[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2)
  • 경남일보
  • 승인 2017.09.0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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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2)

어느 날은 철없는 젊은 취객의 행동에 주제 넘는 간섭을 해서 경찰이 들이닥치게 하기도 했고 한국어 영어 뒤섞어서 악에 찬 욕설을 퍼부어 구경꾼도 취객도 입을 딱 벌리고 말문이 막히게 했다. 나날이 심해지는 귀남의 주정을 보다 못한 호남이 영업에 방해되니까 다음부터 가게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속에서 곪은 귀남의 병소가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온갖 억측과 오해를 사실인양 왜곡해서 양지와 호남을 향해 퍼부었다. 도가 넘치게 부푼 귀남의 패악은 결국 참다못한 호남의 주먹까지 불렀다. 호남이 후려친 뺨을 어루만지면서 귀남은 오히려 깔깔깔 웃었다. 그리고 덧달아서 우리말을 잘하는 그 기막힌 이유도 발설했다. 흰자위가 벌겋게 된 새우 눈으로, 입가에 단 야릇하고 섬뜩한 웃음까지 이리저리 뿌리면서.

“내가 와 이리 한국말을 잘하는 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고 했지? 네까짓 것들이 어떻게 알아. 천만리 떨어진 낯선 나라에서 버림받고, 짐승처럼 떠돌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나를 살게 해주고 버티게 해준 양식, 내가 꼭 살아야 할 이유를 대 준 거 그게 나를 지켜 준거야. 그래서 나는 거의 잊어버린 한국말을 죽자코 익혔지. 왜 였는지 모르지? 머리꼭지에 피도 안 말랐을 때 잠깐 자장가처럼 스쳤던, 내 혼 속에 박혀 있던 말들을 찾아내서 혼자 있어도 미친년처럼 중얼거리며 칼을 갈듯이 말발을 갈아 댔단 말 알아듣겠나? 내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를 가장 잘 담고 표현할 수 있는 건 내 말 뿐이라는 걸. 내가 제일 먼저 자신 있게 입에 올렸던 말이 뭐였는지 모르지? 죽여 버리겠어! 였다. 야이, 가시나 들아!”

그리고 귀남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놀라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고 충분히 만족한 개구쟁이처럼 다시 깔깔거리고 웃어 젖혔다.

어머니께 들은 바에 의하면 귀남이를 입양해 갈 때만해도 귀남의 양부모들은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를 친 자식처럼 잘 키우기 위해 출신을 모르는 곳으로 이사 간다면서 이민을 간 것도 알아볼 만큼 고마운 성품 아니냐고 어머니는 믿었다. 낳기만 했지 부모 노릇 제대로 못하는 친부모 보다 귀남이가 타고 난 복이 있어서 양부모를 잘 만난 거라고 어머니는 아픈 가슴을 누르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술 취해서 뒤꼬인 혀로, 귀남이 스스로 얘기했듯이 ‘제 부모가 버릴 팔자를 타고 난 년이 복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느냐’ 고 자조할 일들이 연속적으로 꼬여서 귀남을 뒤흔들었다.

“갓 이민을 갔을 때는 나도 행복한 아이였겠지. 그러나 친절한 교포 여자와 눈이 맞은 아버지에게 아이가 생기면서 내 인생은 어두운 나락으로 내팽개쳐 졌다. 남편에게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엄마가 낙담을 추스르기 위한 방법으로 꼴짝 꼴짝 마시기 시작한 술로 주정뱅이가 되어 버린 거야. 잘 가리던 똥 오줌도 지리게 된, 젖은 귀저기를 차고 있는 나 때문에 아버지는 마구 고함을 질렀어.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이 아이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차라리 남을 주는 것이 낫다고 막말까지 쏘아 붙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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