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4)
  • 경남일보
  • 승인 2017.09.0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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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4)

“기억 속에 가물가물 지워지려는 것을 기를 쓰고 끌어안은 좁은 등. 눈물을 닦느라고 부지런히 올라가던 팔, 땀에 젖은 살갗 냄새와 따뜻하던 감촉. 엄마가 언제 나를 업어 준적 있었던가. 영문도 모르면서 자리 잡힌 기억속의 행복. 아이 씨팔! 내가 뭔 귀신 씨나락 까 묵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나. 저기 물이나 좀 앗아줘.“

제풀에 역겨우면 기괴한 다른 행동으로 홱 돌변하여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 귀남의 행동. 수 십 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자매가 도란도란 지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래도 연민이라는 것이 있어서 좋았다. 귀남의 가슴을 꺼멓게 멍 들여 놓은 지난 세월을 하루바삐 밝은 색으로 치유시켜 주고 싶었다. 물론 그 때 양지는 하는 일과 생각들이 나름대로 굳어져 있는 성인들이니 결혼한 자매들이 그러하듯이 거처는 각자 따로 정해놓고 자주 만나는 게 낫다고 했다. 그러나 남성처럼 단호한 면이 있는 호남은 당분간만이라도 같이 있어주어야 한다며 제 방에다 침대까지 하나 더 들여놓았다. 하지만 동생 호남이 일 때문에 늦게 들어와도 귀남은 못견뎌했다.

”나 혼자 있는 방. 다시 혼자가 된 빈 방, 타국보다 더 못한 외로움 서러움 속에서 내가 얼마나 이 나라에 돌아 온 걸 후회했는지 모르지? 내 머릿속에는 왜 그따위 노을과 나를 업어주던 엄마의 등 시끌벅적한 부모 형제의 그림자만 남아있었는지 몰라. 죽어도 돌아오지 않는 건데 실수를 했어. 이 미친년이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귀남은 비루둥이 눈만 흘겨도 섧다는 말처럼 제 스스로 뒤안길을 걸으면서 잠재해 있던 자학의 성깔을 시도 때도 없이 드러냈다. 양지는 미운 정은 미운대로 고운 정은 고운대로 천천히 회복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남같이 된 성인 자매간의 치유법이고 사랑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들 독신인 것이 독하게 매듭진 귀남의 한을 풀어주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귀남의 삐뚤어진 행동으로 인해 자매들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그리움이나마 간직되어있을 것을 하는 안타까움으로 서로의 아픔을 깊이 숨기고 있다. 그런 아픈 세월을 보냈구나. 추상적인 짐작으로나마 글썽거리게 했던 동정도 눈물도 시나브로 겉마르고 만 것이다.



호남이 부의 가도로 진입한 다음 양지는 아버지의 변화를 목격했다. 사람의 본심은 알쏭달쏭하다. 제 소유의 업소를 늘여갈 동안 호남은 용돈을 챙겨드렸고, 그만두지 말지류의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버지가 용돈을 받아들 때는 일견 귀여운 애늙은이로 봐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력 수입원이 된 ‘황금박쥐’의 간판을 새로 달았을 때는 어른스럽지 못한 온갖 포달로 딸들의 빈축을 샀다.

“시집도 안간 늙은 딸년들이 드디어 길갓집 논다니로 진출하는 고나. 기생 잡년도 아니고 물장사 딸년한테 명줄 걸고 사는 이런 낯짝으로 세상 살 체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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