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는 기생이었나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논개는 기생이었나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 경남일보
  • 승인 2017.09.2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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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가 곧 열린다. 주요 무대인 촉석루와 임진왜란 때의 논개를 떠올린다. 촉석루는 진주성 싸움에서 지휘부가 있던 곳이다.

논개를 기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일까? 인터넷 두산백과와 최경회 관련 내용을 편집하여 옮겨보자.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전한다. 그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졌다.

구전에 따르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됐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웠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해 승리를 거두었다.(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돼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하거나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최경회는 김천일, 고종후 등과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다.(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으려고 기생으로 위장해 참석했다. 이 자리에 있던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고 왜가 승전 잔치를 벌일 때 관기로 변장해 잔치에 끼어들었으며, 술에 취한 왜장을 꾀어내어 그를 안고 강물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논개는 기생으로 변장했던 적이 있었지만 기생은 아니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 때 상황과 논개의 신분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없다.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때 바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출신과 삶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불명확한 기록으로 논개가 기생이었다고 말할 이유는 없겠다. 논개의 사실을 밝힐 역사 기록이 나온다면 바로잡자. 지금은 구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게 좋겠다.

‘논개는 장수 출신으로 최경회 장군의 후처였다. 진주성 싸움에 죽은 최경회의 뜻을 받들어, 기생으로 변장해 승전 잔치에 들어가 적장을 껴안고 의암에서 남강에 뛰어 내렸다.’

 

고영회(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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