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선비의 풍모
조구호(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특별기고]선비의 풍모
조구호(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 경남일보
  • 승인 2017.09.1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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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은 유학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온 곳이라 옛 선비들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덕천서원을 비롯한 많은 서원과 각 지역의 향교에서 춘추향사를 거행하고 있고, 이이계(二以契)를 비롯한 몇몇 유림단체가 아직도 존속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이계의 계사(契舍)인 이이재(二以齋)에는 급변하는 시속에도 불구하고 유학의 가치와 선비의 풍모를 지키려고 고심했던 분들이 많았다. 회천(晦川) 최인찬(崔寅贊) 선생님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한문 경전에도 밝았고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지만 후학의 지도에도 열성적이었다.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복학한 85년 봄, 학과 동료의 소개로 회천 선생님에게 한문을 배우게 되어 이이재를 드나들게 되었다. 이이재를 드나들면서 회천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선비의 자세와 처신을 직·간접으로 보고 듣게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현직 국회의원 부인이 선거운동원들과 이이재로 인사차 방문하여 선거운동원 중 한 명이 국회의원 부인을 ‘00의원 사모님’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러자 회천 선생님이 “뭐라 사모님, 누구 사모님인데”하시며 호통을 치셨다. 갑작스런 호통에 선거운동원과 국회의원 부인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옆에 계시던 분 중에서 ‘여기가 어른들이 계시는 곳인데 어른들에게 사모님이라는 말이 맞지 않다고 설명을 해주자, 국회의원 부인이 잘못되었다며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국회의원의 위세가 대단하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칫 미운털이 박히면 불이익을 당하는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개의치 않았고, 권력에 굽실거리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권력에 굽실거리는 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데 철저하셨다. 그래서 가야 할 자리인가 아닌가를 엄격히 따졌다.

한번은 당시 고전분야에서 ‘양대 산맥’이라고 하며 존경받던 이모 교수가 진주로 오는 걸음에 선생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이 해제를 쓴 『면우집』과 『회봉집』이 영인본으로 출간되어 학계에서 해제 쓴 사람이 궁금했던 것이다. 당시 지역에서 이모 교수의 비문이나 기문을 받으려고 줄을 대던 상황이었고, 그 교수와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회천 선생님은 이모 교수를 만나지 않았다. 한문 공부를 하던 학생 중의 한 명이 ‘왜 이모 교수를 만나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자기가 만날 일이 있으면 찾아오지 왜 나보고 어디로 오라고 하느냐’며 거절한 이유를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한문 자구를 가르치신 것만 아니라, 선비의 처신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그런 뜻은 알지 못하고, 한문 자구를 익히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선생님은 ‘사람이 본 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곧잘 하셨다. 옛 선비들의 처신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말뜻을 잘 알지도 못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이재에서 뵙던 어르신들이 한 분씩 세상을 떠나고 회천 선생님마저 지난 12일 돌아가셨다.

곳곳에서 ‘선비문화’와 ‘선비정신’과 관련된 여러 행사가 개최되고 학술행사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정작 선비의 풍모는 보기 어렵다.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전통적 가치의 복원도 아닌 행사들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명분과 지조를 중시했던 옛 선비의 풍모가 새삼 그립니다.

삼가 회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조구호(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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