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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4>의기 논개와 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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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8  2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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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5월 개최되는 진주논개제 행사 중 논개가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을 재현하는 장면.경남일보D/B

 

진주성과 촉석루를 바라보면 눈 맛이 절로 난다. 수다스런 단청도, 주책인 니스 칠도 없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일체 속악한 것들이 발붙이지 못한다. 추한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운 것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진주의 자산이자, 진주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촉석루를 뒤로 하고 가파른 바윗길(危巖)을 내려와 의암(義巖)에 오르면 시퍼런 남강 물 빛 속에 서릿발 친 여인의 눈매와 손가락 마디마디 피 멍이 물 든 가락지 낀 여인의 한(恨)이 비친다. 의기 논개(義妓 論介)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진주성 의암 아래 시퍼런 물속 저 어딘가에서 흉악한 왜추(倭酋)를 부둥켜안은 채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하다.

시인 강희근은 이렇게 말했다.

‘진주성의 아우성 소리를 흘러간 과거의 아우성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의 아우성으로 듣는 사람이 향토에 얼마나 있겠는가?’

임진왜란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역사의식, 바로 그것이 역사에 대한 살아 있는 접근이라는 뜻이다. 의기 논개의 정신을 오늘에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권1 인륜편 효열조에서 논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구전돼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 晋州官妓也)’라는 기록으로, ‘논개는 진주의 관(官)에 소속된 기생’이라는 뜻이다. 유몽인은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열(義烈)에 감동해 어우야담에 순국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남강의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어 경종 2년(1722)에는 진주의 사민(士民)들이 명암 정식이 찬한 비문으로 ‘의암사적비’를 세워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충렬실록’에 의하면 정식은 당시의 우병사 최진한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啓請)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했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우병사 최진한의 신보(申報)에 의거해 경종에게 계문(啓聞)하게 되었고, 마침내 급복(給復)의 특전 여부를 시행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논개가 순국한지 130년이 지나 전거가 될 만한 문적이나 족속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진한은 뒷날 좌병사로 전임된 후에도, 논개의 포상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계속 계청해 논개가 의기(義妓)로 호칭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지면서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의기로 불려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의로운 기생으로 되살아나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다시 의기(義妓) 정포(旌褒)를 계청했다.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 마침내 논개의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 부근에 건립되었다. 의기사는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논개를 추모하는 제(祭)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지면서 지루하게 끌어왔던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 된 것이다.

의기사는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생에게 내린 사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진주의 관기’였던 논개가 ‘의로운 기생’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후, 정조 3년(1779)에 병사 홍화보가 의기사를 보수했고, 순조 23년(1823)에는 목사 홍백순, 이지연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고종 5년(1868)에는 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女妓)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를 개최했다. 의기 논개의 제향은 영조 16년 이래 250여년간 진주의 기생들이 매년 음력 6월 29일에 봉행하다가 1992년에는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매년 봉행하고 있다.

논개의 순국사실이 알려진 이후, 논개 선양을 위한 진주 사람들의 쉼 없는 노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비록 논개의 신분이 천한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충절과 의열의 교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 논개를 노래하다

의기 논개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더불어 논개라는 한 인물의 삶에 대해 다양하게 작품을 남긴 경우도 드물다.

논개의 충절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명암 정식의 의암사적비명, 다산 정약용의 진주의기사기, 매천 황현의 시, 김창숙의 의기암, 매천 황현의 시, 산홍의 의기사감음 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의식은 바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이다. 이들은 의기 논개의 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자신들의 항일의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의기 논개가 가진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산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를 지어 의기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다산은 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심산 김창숙 선생도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 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 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 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이처럼 의기 논개는 진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의로운 기생이자 진주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정신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의기 논개 바로 알기

얼마 전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의기 논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 5위에 올라 의기 논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기 논개의 매서운 의열과 정신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문제제기의 근본에는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異說)이 있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논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양반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이며, 최경회 혹은 황진의 애인이다’

인터넷 공간에 ‘논개’라는 단어를 치면 대부분 앞과 같은 내용이 펼쳐진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기 논개’를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러한 논개에 대한 이설에 대해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논개의 신분과 출생에 대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조정에서 내린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 논개와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 진주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가 곧 의기 논개의 역사 현장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의기사는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 그대로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논개로부터 의기라는 말을 떼버리면 논개의 위상은 그것으로 끝난다. 만약 일부의 주장처럼 앞으로도 계속 주논개나 논개부인으로 부른다면 ‘의기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향토사학자인 고 김범수 선생은 ‘논개는 진주 사람이다(1998)’라는 논고를 통해 진주 사람들의 ‘의기 논개 바로알기’를 강조했다. 머리글에서 ‘오늘날은 논개가 장수사람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고, 또 정설처럼 되어 있다.’는 탄식과 함께 학계와 전문가들의 노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논개의 충절을 이어가지 못함을 탄식하는 이가 또 있다. 그는 바로 진주 기생 산홍(山紅)이다.

◇본주 기생 산홍과 진주정신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의기 논개에 이어 진주 기녀의 매운 기품을 만천하에 알렸다. 산홍은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매수하려는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었다. 왜장을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정신과 닮아 있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 산홍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있다.

‘자네 집 금과 옥은 지붕보다 더 높으나/ 한낱 봄 같은 산홍을 사기는 어렵구나’

그리고 산홍은 의기 논개의 충절과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담은 시(詩) 한 편을 지었다. 산홍이 의기사를 참배하고 지은 ‘의기사감음’이 바로 그것이다.

‘천추에 빛나는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과 높은 누각에 서려있네/ 세상에 태어나 뜻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풍악을 울리며 헛되이 놀기만 함이 부끄럽네’

과거 진주 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그런 반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시점이다.

황경규(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 상임대표)

 

의기 논개

-1621년 유몽인 어우야담에 기록이 보인다.
-1629년 진주선비 정대륭이 의암 글자를 새기다.
-1722년 진주 사람들이 의암사적비를 세우다.
-1740년 의기사를 세우다.
-1766년 일대장강 천추의열 여덟자를 새기다.
-1779년 병사 홍화보가 의기사를 보수하다.
-1823년 홍백순이 의기사를 보수하다.
-1868년 목사 정현석이 의암별제를 마련하다.
-1992년 의암별제를 복원

 

   
황경규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 상임대표
-도서출판 사람과 나무 대표
-진주향교 장의
-진주 논개 가락지 날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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