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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55>사육신의 충절이 밴 육신사
경남일보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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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9  23: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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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리 마을 입구에 있는 사육신기념관.

◇추석을 맞이하여 찾아 나선 ‘나의 뿌리’

사육신과 이순신 장군을 통해 충을 배우고, ‘농부의 지게’를 통해 효를 익혔던 세대는 이제 중년기를 접어들고 있다. 오늘날, 도덕교과서에 실린 충효사상이 실행의 덕목에서 암기의 대상으로 바뀐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모든 게 점수로 환산되어 서열화 되는 현실 속에서 맞이한 이번 추석은 ‘나의 뿌리’를 찾는 색다른 여행을 떠나 보기로 했다. 추석 절사(節祀)를 모신 뒤, 가족과 함께 고향집에서 멀지않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육신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진정한 충과 효, ‘나의 뿌리’를 만나기 위해서다.

순천박씨 세거지인 묘리,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이 사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역적에게 삼족을 멸하는 형벌이 내려졌을 텐데, 역적으로 몰린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있다니 참으로 믿기질 않는다. 박팽년의 후손의 생존과 사육신의 위패를 육신사에 모시게 된 경위에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스토리가 있다.

조선 세조 때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을 불의라 생각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김질의 고자질로 거사가 실패로 끝나면서 화를 당한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은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순천박씨인 박팽년의 가문만 생존해 있다. 그 애절하고 극적인 사연은 이러하다. 단종 복위가 실패로 돌아가고 세조에 의해 박팽년은 물론 그의 부친 박중림과 네 동생 그리고 아들 3형제가 모두 죽임을 당했고 모친, 처, 제수, 며느리들까지 모두 대역죄인으로 몰려 공신들의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 됐다. 말 그대로 멸문의 화를 입었던 것이다. 박팽년의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이씨도 관비가 되어 친정 동네인 성주군 벽진면 갈밭골로 내려왔다. 당시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알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로 삼으라고 명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그 무렵 친정집 여종이 딸을 낳았는데, 여종이 낳은 딸과 서로 바꿔치기 하여 가까스로 둘째 며느리의 아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순천박씨 집안의 혈손을 맡은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숨어 살며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이 아이를,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 하여 박비라 불렀다. 박비가 17세가 되던 해 세상이 변해 사육신에 대한 평가도 역적에서 충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무렵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박비의 이모부 이극균은 처가에 들러 장성한 박비에게 자수를 권했다. 박비는 상경해 자신의 신분을 고하고 당시 임금인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성종은 ‘사육신의 후손 중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라는 뜻의 ‘일산(一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육신사 정문.


◇신의와 선행으로 이룩한 육신사(六臣祠)

박일산은 이후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하빈면 묘리에 종택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사당을 지어 할아버지 박팽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그런데 5대손 계창이 고조할아버지인 박팽년의 제사를 모신 밤 꿈에 나머지 사육신 다섯 분이 나타나 마당에 서성였는데, 직계 자손들이 다 죽었으니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구나 하고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꿈에서 깨어난 계창은 다시 제사를 지내드렸다고 한다. 이후 사당을 새로 짓고 사육신 모두를 모셨는데 지금도 사육신 위패를 모셔놓은 육신사(숭정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핏줄은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충절을 지킨 훌륭한 선조를 둔 후손이 행한 선행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충정사 앞에 선 육각비.


충절문을 500m 정도 지나자 묘리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한옥으로 지은 사육신기념관이 있었다. 추석연휴라 충효교육과 현장학습장으로 쓰고 있는 기념관을 개방하지 않은 것이 무척 아쉬웠다. 먼저 육신사부터 찾았다. 입구를 들어서자 아담하게 꾸며놓은 연못이 있었고,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백일홍나무들이 사육신의 혼령인 듯 찾아온 탐방객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당당하게 서 있는 홍살문 앞에서 잠깐 경의를 표한 뒤 육면에다 사육신을 기리는 글을 새긴 육각비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육각으로 된 비의 모양이 이채롭고, 크기 또한 굉장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은 문을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당의 이름도 사육신과 박팽년의 부친을 포함해 일곱 분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육신사 대신 숭정사(崇正祠)라 했다고 한다.

 

   
도곡재로 들어가는 입구.

원래는 서북쪽 작은 고개 너머 삼가헌 위쪽에 있는 낙빈서원에 위패를 모셨는데, 1975년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다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재건하였으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충절문을 새로 세우고 30여 채의 전통가옥들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도곡재와 태고정, 육각정, 삼가헌, 낙빈서원 등 순천박씨 세거지인 묘리 마을의 전통과 역사,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곳이 꽤 많다. 또한 삼성가의 초대회장인 고 이병철 선생의 부인인 박두을님의 생가도 있다.

 
   
마을 뒤 대숲으로 난 산책로.

◇진실된 삶이 훌륭한 명문가를 만든다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육신사를 찾는 탐방객들을 위해 마을 뒷산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대숲길과 소나무숲길, 그리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도 볼 수 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육신사에서 보고 익힌 견문과 이 땅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 가족 사랑과 나라사랑에 대해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사색과 명상을 곁들인다면 의미있는 힐링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명문가 또한 단순히 돈과 이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의 핏속에 참된 삶을 추구하는 DNA가 존재함으로써 나라가 흔들리거나 집안이 기울어갈 때, 그 DNA가 되살아나 나라와 가문을 위해 진실된 삶을 아낌없이 발휘할 때 비로소 탄생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을 쇠고 돌아오는 길, 순천박씨의 후손인 필자는 마음속 깊이 자긍심을 느낌과 더불어 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박종현(시인·경남과학기술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육신사 뜰에 있는 우물
육신사 뜰에 있는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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