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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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0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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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권운동의 금자탑 ‘형평운동’
 


21세기는 인권의 시대로 일컫는다.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엄을 갖고 자유와 평등을 누릴 기본 권리를 갖고 있다. 인류 사회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형평운동은 그 노력의 대표적 사례로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인권 발전의 금자탑이다.


형평운동은 조선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백정 차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창하며 실천한 역사였던 것이다.

조선시대(1392~1910)는 세습 신분에 기초해 유지되어 왔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모의 신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됐다. 신분 위계질서의 관행, 관습, 규범, 가치가 사회를 지배했다. 사회적 위세나 관계, 권한과 의무, 심지어 직업까지도 신분에 따라 결정됐다. 평생 동안 신분에 얽매여 생활하는 조선 사회에서 백정은 최하층 신분 집단이었다. 짐승을 잡거나 고기를 다루고, 가죽을 가공하는 것 같은 특정한 일에 종사하는 그들은 천민 중의 천민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장 천대받으며 살아왔다.

 

형평사 제 6회 정기 전국대회(1928년) 포스터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 백정들이 사용하는 저울(형, 衡)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뜻으로 작명되었다. 곧, 백정 차별을 없애고 평등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거행된 형평사 기성회는 진주지역의 백정과 사회운동가 70여명이 참석한 조촐한 행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역사의 손꼽히는 인권운동의 출발이었다. 기성회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80여명의 백정과 사회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총회가 열렸다. 창립 취지를 밝히는 주지가 채택됐고, 활동 방법, 조직 구성 등이 결정됐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이렇게 시작된 형평사 주지는 형평운동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대우를 강조하는 인권의 기본 정신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장려 같은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며 “참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곧, 일차적 목적은 백정 차별 철폐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사랑을 실현하는 평등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진주에 본사를 둔 형평사는 각 도(道)에 지사(支社)를, 각 군이나 큰 마을에 분사(分社)를 설치하며 전국 조직으로 확대됐다. 창립된 지 1년 즈음에 전국에 80개 조직이 만들어졌다. 전국에 산재한 백정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그 기폭제는 형평사를 만든 지 20일 만에 열린 창립 축하식이었다. 5월 13일 진주좌(옛 진주극장, 현 메가박스 터)에서 열린 창립 축하식에는 경남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백정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또 국내외 사회운동단체들이 축전을 보내왔다. 유사 이래 백정들의 가장 큰 공개적 행사였다. 이 행사를 통해 형평운동은 전국적인 백정 해방운동으로 인식됐다. 그리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메카로 자리매김 됐다.

 

독립운동가이자 형평운동가인 백촌 강상호(1887~1957)선생 묘소(진주시 가좌동 소재). 강상호 선생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신현수 선생과 함께 형평사 조직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양반출신이 백정을 돕는다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백정출신의 인권향상과 교육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 경남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진주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에 애국지사로 추서됐다.


창립된 지 1년 4개월 만에 본사를 서울로 옮긴 형평사는 전국적인 사회운동 단체로 빠르게 발전했다. 각 지역에 지사와 분사가 크게 늘어났다. 1926년에 130개였고, 가장 전성기인 1930년에는 165개에 이르렀다. 형평사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활동 범위를 진주 지역에 한정짓지 않고 전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형평운동의 현안 과제를 논의하는 전국대회가 해마다 열렸고, 각 지역에서는 교육계몽, 경제 권익 보호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형평운동은 신분 차별 철폐와 평등 대우를 주창했지만, 또한 구성원의 경제적 이익 등 공동 권익을 위한 공동체운동을 지향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일제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형평사도 위축됐다. 급기야는 1935년 대동사로 바뀌면서 인권단체의 성격을 상실했다.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운동단체로 기록되고 있다. 또 농민, 여성, 노동 등과 함께 사회운동의 주축이었다. 특히, 신분제의 잔재를 극복하며 인권에 기초한 근대 사회를 여는 사회운동으로 높이 평가됐다. 이러한 형평운동이 어떻게 진주에서 시작되었나? 전국적인 사회운동이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진주에서 시작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진주에 백정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일까? 백정들이 진주보다 많이 거주한 지역은 전국 곳곳에 많다. 그러면 백정 차별이 진주에서 더 심했나? 그렇지 않다. 진주라고 백정 차별이 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그 당시 백정 차별은 중부이남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된 것은 진주의 역사적, 문화적 요인 때문이었다. 진주는 오랫동안 경상도의 중심도시였다. 남명 조식으로 대표되는 뿌리 깊은 학문적,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25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길 때까지 진주는 도청 소재지로서 지방행정의 중심도시였다. 게다가 진주는 사회개혁과 평등사상의 역사적 경험이 많았다.

1862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전국 곳곳에서 연속해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시발이었다. 1894년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가진 동학교도들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의 영향이 진주까지 미쳤다. 그리고 1905년 기독교가 진주에 전파된 이후 기독교를 믿는 백정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비백정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볼 수 없었지만, 평등사상을 접했던 것이다. 그 뒤 1909년에 호주 선교사들이 백정과 비백정의 동석 예배를 추진하자 비백정 신도들이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도들과 백정들은 신분 차별의 부당함을 깨닫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20세기 초 백정들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도 바뀌기 시작했다. 진주에 상설시장이 개설되면서 정육점을 경영하는 부유한 백정들이 생겨났다. 일부는 거주지 격리의 차별을 뛰어 넘어 비백정 지역으로 이주해서 살기도 했다. 이렇게 평등사상이 확산되고, 백정들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바뀌었지만, 백정 차별 관습은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형평사 창립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1919년의 3·1운동이었다. 3·1운동을 주동하거나 경험한 진주의 청년들은 전근대적인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며 여러 성격의 사회운동 단체를 만들어 사회개혁 활동을 벌였다. 그 가운데에는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권익 단체인 진주소년회가 있다. 그 이후에 여러 소년단체들이 줄이어 만들어졌다. 또 1922년에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진주노동공제회가 결성되어 전국 최초의 소작인대회를 개최했다. 1919년 가을부터 지역 유력자들은 고등교육기관인 일신고보 설립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교육도시 진주의 전통을 만들었다. 이렇게 생겨난 단체들이 1925년까지 신문에 보도된 것만도 60개가 넘었다. 그야말로 3·1운동 이후 진주는 ‘사회운동의 시대’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직업적 사회운동가처럼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활동가 중심으로 사회운동 세력이 형성되어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 신분 차별 철폐와 평등 사회 건설, 인권 존중의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회 개혁 의지가 모아진 것이다. 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백정 출신만이 아니었다. 비백정 출신의 직업적 사회운동가들도 동참했다. 그 가운데에는 3·1운동을 주동해 복역했던 이도 있고, 지역 언론인도 있다. 백정과 비백정의 협력은 형평운동의 특징이 됐다. 그것은 3·1운동 이후 진주 지역에 형성된 공동체 정신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진주 지역 주민들이 모두 형평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형평운동 반대 활동도 전국 최초로 진주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일부 주민들은 형평운동에 반대하여 소고기 불매운동을 벌였고, 형평사원들이나 협력하는 사회운동가들을 집단적으로 공격했다. 형평사 측에서도 결사항전의 자세를 취해 양 측이 충돌했지만, 지역 청년단체의 중재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 형평운동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이 주민들 사이에 확산됐다거나, 전근대적인 역사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형평운동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형평운동 반대 활동을 펼친 주민들처럼 인식하고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 평등과 기본 권리를 강조하는 형평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몫이다. 형평운동이 불합리한 신분 사회의 폐습을 극복하고 평등과 존엄이 존중되는 근대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분 차별 관습을 없애고, 공동체 권익을 도모하려는 형평운동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중섭(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김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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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형평운동가인 백촌 강상호(1887~1957)선생 묘소 입구(진주시 가좌동 소재). 강상호 선생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백정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신현수 선생과 함께 형평사 조직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양반출신이 백정을 돕는다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백정출신의 인권향상과 교육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 경남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진주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에 애국지사로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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