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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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7.10.1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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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여성에게만 지워진 죄 '낙태'
박지숙(27세, 가명)씨는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4주가 지나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지숙씨는 산부인과에서 ‘임신4주’ 확진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바로 낙태 수술을 요청했지만, 병원 측에서 거절을 당했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은 임신중절 수술 허용사유에 해당하지만 피해자인 것을 입증해야하기 때문이다. 지숙씨는 수술을 위해 성폭력 상담 확인서와 가해자 고소사실 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가해 남성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해 고소사실 확인서 발급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그 사이에 지숙씨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결국 수술은 10주가 더 지난 14주차에 위험성과 비용이 늘어난 상태로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낙태(임신중절수술)는 불법이다. 1953년에 제정된 낙태죄는 형법 제27장으로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어 1973년, 유전적 문제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모자보건법’(제14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이 제정됐다.

낙태죄가 강화된 이면에는 국가정책이 있다. 낙태죄는 오래전에 제정됐지만, 과거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던 시절에 국가는 낙태를 눈감아주곤 했다. 태아가 여아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것도 빈번했다. 2000년대 이후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낙태죄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구가 많을 때는 낙태죄를 무시하고 가족계획을 강요하다가, 인구가 필요해지자 낙태죄를 처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7명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낙태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여성(19세 이상) 6명 중 1명 꼴로 원치 않는 임신을 경험했고 이들 중 60% 가량이 낙태를 했다. 이들 대부분의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사유에 포함되지 않는 불법이었다.

의학적으로 100%의 피임법은 없다. 여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경구피임약의 경우 수많은 부작용을 떠안고 있고, 남성의 경우 성적 감흥이 감소된다는 이유로 콘돔사용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후피임약 역시 산부인과의 진료를 받아야만 구매할 수 있고, 효과도 확실하지 않다. 임신중절수술은 여성의 몸에 치명적인 부담을 주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이다.

현행법상 산부인과의사가 임신중절수술을 하다 적발되면 한 달간 자격이 정지된다. 특별한 경우에만 수술이 허용되다보니 터무니없는 수술비를 요구하며 불법으로 수술을 해주는 곳도 많다. 불법 수술을 경험한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술실이 비위생적인 경우도 허다했고, 수술 후 출혈이 멈추지 않는 등 부작용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기본적인 의료를 받을 권리조차 낙태죄가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낙태죄는 이 모든 부담을 여성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남성의 경우 수술 동의서에 서약하면 낙태방조죄로 처벌 받을 수 있으나, 이를 악용해 여성을 협박하기도 한다. 지난 5월에는 낙태 수술 부탁을 들어준 의사와 교제하던 여성을 협박해 돈을 뜯고 고발까지 한 남성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생명은 존엄하다. 하지만 낙태죄는 존엄성이 아닌 생산력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낙태죄에는 여성의 몸과 자궁을 분리해 부계중심적인 사고 안에서 ‘이 자궁 안에는 남성의 아이가 들어있고, 이것을 여성이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낙태죄가 있다고 해서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건강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바뀌어야 할 때다.

오진선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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