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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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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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진주농민항쟁
진주시 수곡면 창촌교 주변 소재 진주농민항쟁기념탑.

 

‘1862년 진주농민항쟁’은 삼정(三政)의 문란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과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류계춘(柳繼春, 1816-1862), 김수만(金守萬 1818-1862), 이귀재(李貴才, 1818-1862) 등이 농민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 운동이다.

◇왜 진주에서 일어났나=진주농민항쟁의 원인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진주지역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남명학파 가문이 분열함으로써 수령권을 견제할 기능을 일찍이 잃었다. 이로써 군정과 행정을 관장하는 우병사와 목사에 의한 자의적 수탈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한편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신분제와 조세제도 등 봉건적 지배체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전정 군정은 지속적으로 재정비됐다. 하지만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재정 운영은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됐다. 이렇게 되자 원래 농민 구휼(救恤) 정책으로서 나온 환곡의 이자로써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했다. 환곡은 국가 재정의 근간으로 삼정의 하나가 됐다.

 

보물 제1600호 진주성도 진주 객사 봉명루 앞 진주 장시. /사진제공=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그런데 삼정 가운데 환정은 운영 과정에서 수령과 서리의 중간 횡령 등으로 인한 결손 부분, 곧 포흠(逋欠)이 발생했다. 행정과 군정의 중심지 진주의 포흠은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환곡의 포흠이 1840년대부터 심해지자, 진주목은 1855년부터 농지에 일정한 세를 부과했다.

1859년(철종 10) 10월 29일자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농지에 부과한 세액이 1855년부터 1859년까지 12만5000여 냥에 이를 정도로 농민들은 극심한 수탈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흠은 심각해서 1861년 12월 목사 홍병원이 이전 결당 2냥 5전보다 훨씬 많은 6냥 5전씩 도결(都結)을 결정했다. 실제 결수를 1만결로 잡으면 도결 액수가 6만 5000냥으로서 미(米)로 환산 시 대략 2만여 석에 이르는 양이었다. 다음해 1월에 우병사 백낙신은 약 6만 냥을 통환(統還)의 방법으로 충당하도록 결정했다. 이처럼 우병영과 진주목은 통환과 도결로써 환곡의 포흠을 손쉽게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농민항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몰락 양반과 빈민층이 항쟁 지도부 형성=이명윤, 성계주, 조학면 등 사족들은 항쟁의 초기 단계에 참여했으나 그들은 본격적인 항쟁 단계에서 이탈했다. 결국 항쟁의 핵심 세력은 몰락 양반과 농민층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을 ‘진주 초군(樵軍) 작변(作變)’이라 할 정도로 농민층 가운데 빈농층이 대거 참여했으며, 항쟁의 핵심 세력이었다고 한다.

항쟁 모의지 내평마을에서 태어난 류계춘은 몰락 양반, 승음촌(승산리)에서 태어난 이귀재는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정도로 빈농층이었다. 김수만도 장교라 하지만 앞의 두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류계춘의 삶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류계춘은 본관이 문화, 아버지가 류지덕, 할아버지가 류점, 외할아버지가 정홍진이며, 조계 류종지의 9세손이다. 류계춘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1816년 진주목 원당면 원당촌에서 태어나 35세 때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축곡면 내평촌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갔으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1862년 8월 30일에도 어머니 정씨는 생존하고 있었다. 류계춘은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상당한 지식을 갖춘 농촌 지식인으로 볼 수 있다. 안핵사 박규수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향리의 논의를 주도하고, 향회나 이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읍이나 감영에 제출하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등 향촌의 여론을 주도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계열, 박수익, 정순계, 곽관옥, 우양택, 최용득, 안계손 등이 항쟁 단계에서 적극적 역할을 맡았다. 특히 이계열(이명권)은 이명윤과 6촌 형제였지만 경제적으로 빈농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계열은 단성현의 단계 김인섭의 아버지 해기옹 김령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홍문관 교리 이명윤이 농민의 사정에 공감하다=전문 연구자의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진주농민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내평마을 출신 안호(安湖) 이명윤(李命允, 1804-1863)이다.

이명윤은 1838년(헌종 4)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에 나아가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그는 1855년(철종 6) 이후 홍문관의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됐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다만 1856년 겨울에 다시 부교리에 임명하자 부득이하게 대궐에 나아가 임금을 만난 뒤에 글을 올려 휴가를 청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858년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말로 기득권층이었다.

이명윤은 농민항쟁 초기에 중앙의 벼슬살이 덕분에 진주 내평마을 사람들의 웃어른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진주목과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을 상대로 한 교섭의 창구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의 형편을 대변하였다. 그는 그것이 훗날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줄을 당시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명윤은 중앙관료 출신이어서 당연히 환곡을 면제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벼슬살이에서 청요직을 지내지 않았던가. 이러한 개인적 불만에 더하여 그는 농민의 사정에 더욱 공감하였다. 그렇더라도 그가 농민의 사정을 진주목 관아와 우병영 관아에 대변하는 일은 그렇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명윤은 비록 항쟁이 격화하면서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그는 농민이 관의 자의적 수탈에 내몰리는 상황에 나 몰라라 하고 뒷짐 지고 물러나 앉아 있지만은 않은 인물이다.

◇항쟁의 시작과 과정은 어땠나=1월 30일 류계춘, 이명윤, 이계열 등은 사노(私奴) 검동(儉同)의 집에서 도결과 통환의 타파를 위해 논의했으며 2월 2일 류계춘 등은 박숙연(박수익)의 집에서 구체적 행동계획을 위해 통문 작성하고, 2월 6일 수곡 장시에 맞춰 도회를 결정했다. 수곡도회 때 도결과 통환의 철폐를 위해 사족 정수교 등은 감영에 직접 호소하자는 온건한 방법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류계춘 등은 읍내에서 집단 시위를 하자는 강경한 방법을 들고 나왔다. 결과적으로 강경한 방법이 이후 항쟁의 방향으로 정해졌다.

산청군 덕산 구장터 전경.


류계춘은 수곡도회 직후인 2월 7일에 병영에 감금되었다. 2월 13일 그는 제사를 구실로 휴가를 얻어 귀가하였는데, 다음날 덕산장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는 2월 6일 수곡도회 이후 지리산 끝자락 백곡면과 금만면 농민들이 지리산 속의 시천면과 삼장면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세력을 규합하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류계춘을 비롯한 농민항쟁 지도부가 더 많은 농민들을 항쟁의 대열로 묶어세워 역량을 강화시키려는 전술에서 나왔다고 한다.

덕천강과 백운계곡물이 만나는 옛 수청가자리.


산청 시천면으로 가다가 백무동 계곡물이 덕천강을 만나는 지점의 수청거리에서 모임을 가진 직후 2월 14일 농민들은 덕산 장시를 공격해 세금을 매기는데 참여한 인사의 집을 파괴하고 지방권력과 결탁해 향촌 상권을 장악한 대상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농민들은 덕천강을 따라 수곡 장시, 마동 장시, 모의지인 내평마을, 18일 진주 읍치에서 10리 떨어진 평거역을 거쳐 진주성 북벽을 따라 읍내에 들어와 장시에 진을 치고 시위를 통한 요구 조건을 관철했다.

농민군은 우병사와 목사로부터 통환과 도결을 혁파할 것이라는 공문을 받아내자 20일부터 23일까지 평소 소작인과 갈등을 겪던 지주 등을 공격하였다. 이때 진주 70개면 중 22개 면(面)을 공격하여 56채의 집을 파괴하고 40채의 집에서 재물 압수하였다고 한다. 그 주요한 장소 가운데 소촌역과 옥천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23일 농민군은 옥천사를 떠나 일부는 곧장 북쪽의 반성으로 가고 일부는 읍내로 돌아가 흩어지게 됐다.



◇항쟁이 끝난 후 그들은 어떻게 됐나=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세도정권은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파견해 일의 전후 사정을 조사하고 소위 주모자를 추적하여 검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은 삼정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했다.

1862년(철종 13) 5월 23일자 철종실록에 의하면 비변사에서는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류계춘 등 3인과 아울러 이계열 등 7인도 모두 효수(梟首)코자 했으나 철종은 이계열 등 7인에게 차율(次律)로 처벌할 것을 결정했다.

8월 30일 가을 날, 아침 밥 먹을 시간에 류계춘, 김수만, 이귀재는 우병영 남쪽 관문 밖 들판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인 수많은 진주 읍민들 앞에서 효수되었다. 그들은 자신과 이웃의 삶에 충실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계열 등 일곱 사람은 곤장을 맞고서 유배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가담자들도 곤장을 맞거나 도망갔다.

이명윤은 1862년 5월에 진주농민항쟁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유배에 처해졌다. 그 유배지가 강진현의 고금도인데,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억울함으로 날을 지새우며, 자신이 허물없이 죄인이 된 사정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그는 울분을 주체할 수 없어 통곡하다가 귀양에서 풀어준다는 소식을 채 한 달 정도 앞둔 1863년 5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진주시 대평면 옛 마동장터가 있던 곳, 현재 수몰돼 진수대교가 가로지른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경상대 김준형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변혁을 선도한 진주는 역사적 계기마다 선구적 역할을 해 왔다고 했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은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지역에서 제대로 기념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지금의 수곡도회의 장소에 세워진 것과 같은 기념탑이 아니더라도 ‘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중요 장소마다 조그마한 표석이라도 세우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잊고 살던, 심지어 애써 지우려고 했던 후손들이 조상들의 삶을 떳떳하고 자랑할 만한 업적이라 스스로 내세우는 그날이 진주정신이 빛나는 날일 것이라고 본다. 진주정신은 거창한 게 아니다. 역사에서 진주정신은 모든 인간이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삶을 누리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지역의 구성원으로서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진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다. 진주정신을 내세우는 앞으로의 삶도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 박용국 외래교수

▶필자약력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경북대 사학과(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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