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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57>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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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6  23: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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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쌓아 피라미드 양식으로 조성한 구형왕릉.

◇슬픈 가야사 켜켜이 쌓인 구형왕릉

동의보감촌에서 구형왕릉으로 가는 십 리 국도 변에는 떼지어 핀 구절초 꽃들이 영글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구형왕릉으로 가는 초입, 구형왕과 왕비인 계화왕후의 신위와 존영을 모셔놓은 덕양전이 있다. 덕양전 왼편으로 난 길로 1,2분 정도 승용차로 가면 길 오른쪽에 김유신 장군이 7년간 구형왕릉 옆에서 시능살이를 할 때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음을 알리는 ‘김유신 장군 사대비’가 있고, 길 반대편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이 아들에게 양위하고 이곳에 와서 궁을 짓고 살았다는 내력이 적힌 ‘태왕궁지비’가 있다. 그곳에서 300m 정도 올라가면 구형왕릉이 나타난다.

가락국의 제 10대 왕인 구형왕은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인해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인지한다.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국왕의 도리’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주기로 합의’하는 조건부 병합을 요청한 왕은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막고자 싸움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가락국을 신라에 넘겨주었다. 그러자 법흥왕은 가야의 왕에게 금관국(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주고, 가야 왕족을 진골로 편입해 귀족 대우를 해주며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구형왕은 식읍을 다스리는 일을 사양하고 지리산 옆 이곳 왕산으로 들어와 은거하다가 5년 후에 세상을 뜨는데, ‘나라를 잃은 죄와 원통함이 이리도 큰데 내 어찌 편히 흙에 묻히겠는가. 나의 무덤은 돌로 만들어라’는 유언을 남겨 이렇듯 돌무덤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해서 구형왕릉을 조성하게 된 경위를 간추려 보았다. 돌을 쌓아서 만든 구형왕릉은 무척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가락국의 후예로서 왕릉 앞에 서서 먼저 묵념을 올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들어온 구형왕릉이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능 앞에는 좌우로 문인, 무인석과 사자상 등 석물들이 능의 주인을 지키고 있었으며, 능 앞쪽 가운데에 있는 비석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고 비문이 적혀 있었다. 돌로 만든 무덤, 자신이 통치하던 나라를 잃고 사랑하던 백성들을 신라에 넘긴 죄책감으로 따뜻한 흙 속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차가운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한 구형왕의 인간적인 모습을 떠올리니, 망국의 한을 품고 차가운 돌 속에 외롭게 누운 왕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백성을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 패한 구형왕이 살았다는 수정궁터.


◇잡초 무성한 풀숲으로 변한 수정궁터

구형왕릉은 우리나라 유일한 석릉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7개의 단을 이루고 있으며 능의 높이가 7.15m에 이르는데, 밑에서 다섯째 단에 감실이 하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석릉 앞쪽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정도의 돌담이 둘러쳐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다. 왕릉 옆에는 능을 수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호릉각이 있고, 그 옆쪽 암벽에 장보암이 있다. 벼랑 위쪽 바위, 사각형의 석문 안에 김해 김씨 사보(史譜)가 있었다고 해서 그 바위를 장보암이라 부른다. 석릉의 돌 틈마다 가락국의 한과 왕조의 비밀, 그리고 백성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듯해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임도를 따라 왕산사지와 수정궁터, 유의태 약수터로 올라갔다. 승용차를 이용한 것이 예가 아닌 듯해 마음이 걸렸지만 필자가 발목을 다쳐 어쩔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원두막정자 옆 안내판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왕산사지부터 찾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절터에는 부도탑 4기만 남아있었다. 마침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빈 절터를 채우고 있어서 부도탑이 덜 외로워 보였다. 왕산사지에서 100여 m 위쪽 오른 편에 수정궁터가 있었는데, 팻말이 없었더라면 이곳이 옛궁터임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풀숲 속에 숨어 있었다. 궁터는 잡초 무성한 묵정밭처럼 변해 있었다. 시조 김수로왕이 첫째 아들 거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와서 태왕궁을 짓고 여생을 보냈으며, 그 궁터에 가락국을 신라에 넘겨준 구형왕이 회한의 시간과 함께 은거했는데 이름을 수정궁으로 불렀다고 한다. 가락국의 그 어떤 발자취도 찾아보기 힘든 황무지 같은 옛궁터에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척 허망했다. 수정궁터에서 다시 오르막길을 200m 정도 올라가니 류의태약수터가 나타났다.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류의태 선생이 약재를 다릴 때 사용했다는 약수터는 반석을 깔아 멋스럽게 조성해 놓았다. 실제 류의태 선생이 이용한 약수터는 이 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가뭄이 심해 물이 말라 있다고 한다. 돌너덜 아래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인 이 약수터는 위장병·피부병 등 난치병에 효과가 있다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당대 하늘이 내린 신의로 칭송받은 류의태 선생은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에게 의학 지식을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한 우리나라 의학계에 전설처럼 남아있는 인물이다.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석 달 열흘 동안 고생하고 있는 내 아픈 발목을 보이며 침이라도 한 대 맞고 싶다는 공허한 생각까지 들었다. 약수터에서 물 한 잔을 들이켜자, 마음이 매우 상쾌해졌다. 아픈 발목에서 느끼던 통증도 많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를 했던 곳에 세운 사대비.


◇단풍 무늬로 되살아난 김유신 장군의 얼

내려오는 길,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기 위해 무예를 닦은 곳임을 표지(標識)해 놓은 사대비 앞에 잠깐 머물렀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은 나라 잃은 슬픔 속에 빠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인 신라의 백성으로서 신라를 위해 분골쇄신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이 곧 자신을 위한 길이고 나라 잃은 가야인들이 신라인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게 하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의 참된 얼이 왕산 기슭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 탐방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듯했다. 슬픈 가야사가 다시 단풍든 가을산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는 듯해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김수로왕이 살았다는 태왕궁터의 표지비
김수로왕이 살았다는 태왕궁터의 표지비.
신의 유의태 선생이 이용한 약수터
신의 유의태 선생이 이용한 약수터.
왕산사지와 부도탑
왕산사지와 부도탑.
유의태 약수터로 가는 길
유의태 약수터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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