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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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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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비봉산
▲ 동여도(東輿圖)의 지리산, 산줄기 형세가 강한 필치로 표현되고 천왕봉과 반야봉이 대표지명으로 표기됐다.


◇진주를 품은 명산

진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들자면 뭐니 뭐니 해도 지리산과 비봉산을 빼 놓을 순 없을 것이다. 진주시민들에게 두 산의 의미는 무엇일까?

비유하자면 지리산은 진주라는 터전의 조상과 같고, 비봉산은 주인과 같은 산이다. 지리산은 이미지처럼 어머니와도 같이 진주를 지키는 산이요, 비봉산은 이름처럼 비상하는 봉황과도 같이 진주를 살리는 산이다.

지리산은 진주와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진주의 산이라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조선시대만 해도 진주고을의 영역은 지리산에 접해있었다. 진주는 지리산권역이었던 셈이다. 현 산청에 속하는 지리산권역을 떼 내어 준 것은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부터였다.

그래서 진주의 대표적 읍지인 진양지(1632)에는 지리산과 진주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지리산은 고을의 서쪽 백리에 있다. 지리산을 둘러 십여 고을이 있는데, 진주는 그 동쪽에 있다.’ 사실 백리가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멀게 느껴지지만, 진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지리산이 얼마나 가까이 보이는지 실감할 수 있다. 맑은 날 손을 뻗치면 닿을 듯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겨울철 흰 눈 덮인 지리산은 자못 성스럽기까지 하다.

진주의 지리산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거는 늦어도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에서는 나라의 오악 중에 남악인 지리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삼국사기에 ‘지리산(地理山)은 청주(菁州·현 진주)에 있다’고 그 소재지를 분명히 부기했다. 그래서 지리산신을 모시는 제사지도 진주 영역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만하더라도 진주의 지리산 대천왕사(大天王祠)에서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전한다. 지리적, 신앙적으로 지리산이 진주에게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 망진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어머니 같은 존재 지리산

생활면에서도 지리산은 진주를 있게 하는 산에 다름아니다. 진주사람에게 지리산은 이름만 들어도 넉넉하고 푸근한 어머니로 연상된다.

왜 어머니산일까.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사람들을 먹이는 생명수는 대부분 지리산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지리산 어머니의 젖줄인 셈이다. 진주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면 자식을 거두려고 커다란 치맛자락을 펼치고 있는 듯한 산의 생김새도 모성적인 이미지이다. 이미지만 아니라 실제로 지리산은 태풍도 막아주고 중국발 미세먼지도 막아준다. 그 생명의 산, 지리산의 품에 수많은 동식물과 사람들이 모여 수 천년동안 살아왔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지 뚜렷이 알기 위해서는 금강산과 한라산을 비교해보면 된다.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지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 수가 없다. 거기에는 하천도 작고 농경지도 부족하다. 돌산이라 사찰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물이 부족한 것은 한라산도 마찬가지다. 한라산에는 강수량은 많지만 비만 오면 물이 땅속으로 빠져버린다. 그래서 하천은 물이 말라버린 건천이다. 그 빗물이 복류하다가 해안가에서 용출하니 바닷가에 마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의 자연환경과 토양조건은 다르다. 흙산이라 수자원도 풍부해서 논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산속에서 수 백 년 동안 대를 이어 논밭을 갈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덕산이요, 어머니산이다.

지리산은 한국의 산에서 가장 골짜기가 깊다. 골짜기만 깊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골짝골짝 어디곤 사시사철 물이 철철 흐른다는데 비밀이 있다.

이런 산은 국내외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산이 높아 강수량이 풍부한데다가 물을 머금는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벼농사가 가능했다. 벼농사는 많은 사람들이 먹여 살리는 획기적인 농경 방식이다. 산 속이라도 장기지속이 가능한 마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리산 곳곳에는 어미 품에 둥지를 틀듯이 수 백 년을 산과 더불어 공동체로 살아온 놀라운 생활사의 문화전통이 있다.

골짜기가 깊은 지리산은 숨어 사는 피신의 땅이면서도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산실이기도 했다. 지리산은 저항세력의 거점이었다.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이나 1870년의 진주변란 때에도 지리산 자락인 덕산은 항쟁의 거점이었다. 변혁의 산으로서 지리산의 전통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 활동으로 이어진다. 지리산은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으로 빚어진 한국전쟁과 그 역사적 과정에서 전개된 분단의 극복을 위한 민중들의 저항의 현장이었다. 이래서 예부터 지리산은 ‘불복산(不伏山)’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리라. 진주의 혁신정신은 그 뿌리를 지리산의 변혁정신에 두고 있는 것이다.

흔히 오래 살면 사람은 서로 닮는다고 한다. 사람 사이만 닮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산을 닮는다. 춘향가 한 대목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산세 따라서 사람도 타고나는 법이여. 경상도 산세는 산이 웅장하기로 사람이 나면 정직하고, 전라도 산세는 산이 촉(矗·삐죽)하기로 사람이 나면 재주 있고, 충청도 산세는 순순(順順)하기로 사람이 나면 인정이 있고…’ 이 사설은, 산세를 타고 사람이 나고, 산세에 따라 지역의 인성도 달리 형성된다는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 가마 속의 도자기가 비슷하게 구워지듯이, 같은 공간과 환경 속에서 비슷한 문화와 인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주사람들은 무던한 지리산을 많이 닮은 것 같다.

 
▲ 해동지도의 진주와 비봉산 표현, 진주 시가지를 날개를 펼쳐감싸듯 둥글게 에워싼 모습이다.



◇봉황의 형상 비봉산

조선시대의 옛 지도에 진주의 산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지리산과 함께 비봉산은 중요하게 그려졌다. 특히 비봉산이 옛 지도에서 중요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진산(鎭山)으로의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진산은 왕도와 고을을 지키는 주요한 산으로서, 조선왕조는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대부분의 고을에 진산을 지정한 바 있다. 진산은 지리지의 형승 표현에서도 다수 나타난다.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에는,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라고 서술했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집현산에서부터 진산인 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강조됐고 비봉산에서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읍치를 에워싸는 모습이 여실히 표현됐다. 조선시대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산줄기 인식은 당시의 지배적인 지리사상인 풍수와 결부돼 지도상에 재현됐던 것이다.

그런데 진주의 진산 이름을 왜 비봉산이라고 했을까? 우선 모양새가 그렇다. ‘비봉산은 비상하는 봉황의 모습’이라는 진양지의 표현대로, 비봉산은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진주고을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서쪽 날개는 두고개와 당산재이고, 동쪽 날개는 말티고개와 선학산이다. 비봉산의 품에 시가지가 형성되었고, 남쪽으로는 남강이 시내를 에둘러 흐른다. 실제의 비봉산은 도심의 북쪽에 시내를 가로로 펼쳐 등진 162m의 나지막한 산에 불과하지만, 진주에서 비봉산이 갖는 위상은 매우 크다. 그래서 옛지도에서도 비봉산은 크게 그려졌으니 상징적 이미지가 강조된 까닭이다.

비봉산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봉황은 날짐승을 대표하는 신성한 상징물이다. 용, 거북, 기린과 함께 네 가지 영물이다. 특히 봉황은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면 날아온다고 해서 덕치와 태평성대의 상징이었다. 고을의 진산으로 비봉산이란 이름이 선호된 이유는 이런 정치사회적 배경도 지니고 있다. 봉황이란 말의 어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바람에 이른다. 봉(鳳)은 갑골문에서 바람과 같이 통용됐다고 한다.

 

▲ 진주시가지와 비봉산


봉새(鳳鳥)는 바람신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비봉은 하늘로 날아오르려 날개를 펼치는 활기찬 바람이다. 비봉산으로 인해 진주고을민들은 집단공동체적으로 고무되고 고취되는 것이다. 진주고을민들은 비봉산을 곁에 둠으로써 봉황 같은 인물을 염원하고, 자손이 융성하며, 봉황이 머무는 태평한 고장을 만들려 했다. 비봉산은 주민들에게 우러르고 닮을 산으로 산천에너지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진주고을에서는 비봉산의 상징을 풍수적, 문화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지명과 건축경관 등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비봉산을 마주한 산에 그물 망자를 써서 망진산(網鎭山)이라 새로 이름 짓고, 객사 앞의 누각은 봉명루(鳳鳴樓)라고 불렀다. 봉황을 머물게 하려는 뜻이었다. 비봉산은 진주의 번영을 보장하는 것으로 믿었던 사실도 민간 설화에 잘 반영되고 있다. 봉황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는 말티고개(馬峴)로 큰길을 내고 난 후 조선 초까지만해도 융성했던 인재가 그만 줄었다는 것이다. 말티고개는 비봉의 왼쪽 날개인데, 사람들이 여기에 큰길을 내서 날개를 끊어 놓았으니 봉황이 힘차게 날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인 비봉산의 역사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설화는 진주사람들이 믿었던 전래의 풍수적인 환경인식과 그에 상응한 경관형성의 사례를 잘 보여준다. 진주고을의 주민들은 비봉산의 산천정기를 잘 갈무리하여 자손의 융성과 공동체의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좋은 터전에 살고 싶다는 긍지와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비봉산을 둘러싸고 전개된 역사문화는 진주가 터잡고 있는 여건에 적응하고자 한 문화생태학적인 대응방식으로서, 오늘날의 환경인문적 가치에 비추어도 의미있게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산에 대한 인식의 전환기에 서 있다. 근대의 산은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된 한갓 장애물이나 개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산은 생태환경적인 뭇 생명의 존재기반으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진주를 가꾸기 위해선 선조들의 지리산과 비봉산에 대한 의식과 전통을 반조하고 미래가치로 되살려야 할 것이다. 지리산만 하여도 진주시민이 주도해 자연생태적, 문화역사적 가치를 한층 더 증진시켜 나가고,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의 소중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진주를 지키는 시민의 주산으로서 그 위상과 역할을 제대로 복원하여, 비상하는 천년도시 진주의 아이콘이자 상징으로서 고취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진주혁신도시에서 바라본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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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현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학회장
경상대학교 교수, 명산문화연구센터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전문위원
저술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2014), ‘산천독법’(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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