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서 가야 건물지·토기 출토
김해 봉황동 유적서 가야 건물지·토기 출토
  • 박준언
  • 승인 2017.11.21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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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가 ‘가야 왕도’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봉황동 유적지에서 가야시대 대형 건물이 존재했음을 추정케 하는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유물 중에는 당시 지배계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함께 출토 돼 이곳이 왕궁터였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김해 봉황동 유적 북동쪽 발굴조사 현장에서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지 10여기와 토기 수백점을 발견했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연구소는 지표면을 기준으로 4.5m 아래까지 파고들어가 원삼국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부터 가야시대,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문화층(특정 시대의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특히 가야 문화층에서는 지름 10m를 넘는 타원형 건물지들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3호 건물지는 장축 15m, 단축 12m로 둥글게 벽을 두르고 내부에는 기둥을 세운 형태다.

또 봉황동 유적에서는 의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화로형 토기, 통형기대(筒形器臺·긴 원통을 세운 그릇받침) 등 다양한 토기 조각들도 나왔다.

화로형 토기는 금관가야의 지배층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토기와 문양이 비슷하다. 통형기대는 동그란 무늬가 새겨진 기다란 띠를 붙이고, 몸체의 대각선 방향에 구멍을 뚫은 점이 특징이다. 기마인물형토기에 달린 것과 흡사한 각배(角杯·뿔 모양 잔)와 토우도 출토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지난해 수레바퀴 모양 토기, 장신구에 이어 올해 대형 건물지와 의례형 토기가 다수 발굴되면서 이곳이 가야 유력인물의 생활공간임이 확인됐다”며 “내년 3월께 발굴조사를 재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1899년 발행된 ‘김해군읍지’ 고적(古蹟) 조의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에 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금관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부터 현재까지 약 70여 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된 봉황동 유적지에서는 토성(土城), 수혈주거지, 패총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지만 왕궁터로 인정할 만한 유물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박준언기자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나온 건물지. /사진제공=문화재청
1번이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나온 화로형 토기 조각. 2·3번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사진제공=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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