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학(美學)
김형진(시조시인)
죽음의 미학(美學)
김형진(시조시인)
  • 경남일보
  • 승인 2017.11.2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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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
요즘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 중에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다. 60세부터 데리러 오는 저승사자들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차례로 돌려보내게 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미 극락세계에 와 있다고 전해라’고 함으로써 죽음을 스스로 컨트롤 한다는 뉘앙스마저 깔려 있다.

그렇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이라면 일단 슬픔과 공포의 사안으로 여김은 분명하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보면 생전에 찍은 것이어서 그렇겠지만 영정들마다 엷은 미소로 극도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영정들을 볼 때마다 45년쯤 전의 고등학교 시절 같이 하숙하던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곤 한다. 내용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라서 고등학생 신분과는 맞지도 않고 어쩌면 철없는 청소년들 생각이라서 좀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우리 둘은 제법 진지했었다. 토론의 주요 골자는 ‘죽음도 슬퍼만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논리였다.

인간의 탄생을 인생의 입학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나중에 맞는, 가장 큰 의미의 졸업, 즉 인생의 졸업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을 졸업으로 여기는데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아직 많을 것으로 알지만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입학과 졸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게 되는데 입학은 무조건 축하를 받게 돼있다. 그런데, 졸업은 어떤가? 다른 모든 졸업은 축하 받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데 인생의 가장 큰 졸업인 죽음은 하나같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기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죽음도 물론,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당하게 되는 참상(慘喪)의 경우야 당연히 애석하고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태어날 때 타고난 수명만큼, 충분히 살다가 하고 싶은 일 실컷 하고 영면에 드신 소위 호상(好喪)의 경우는 통념을 깨고 축복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일생은 출생도 죽음도 절대로 스스로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구태여 반길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죽음이라는 과정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면, 당사자부터가 졸업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네 인생 말년이 심적으로 보다 풍요로울 수 있을 거라면 허황된 생각일까. 천상병 시인의 ‘귀천’ 한 구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마음처럼.
김형진(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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