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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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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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남강

진주와 남강은 따로 나누어질 수 없다. 진주가 아니었다면 남강은 수많은 낙동강 지류의 하나였을 뿐이다. 남강은 진주를 안아서 더 아름답고, 진주는 남강의 품속에서 역사에 남는 도시가 됐다. 남강이 휘감아 둘러싼 구릉지 위에 하늘이 내린 요새처럼 우뚝한 진주성을 거점으로 진주는 역사가 겹겹이 쌓인 도시가 됐다.
 

진주성 촉석루(고토 분지로 지음/손일 옮김, 2010, 조선기행록, 푸른길 271쪽)


우리말은 산수, 산천, 강산 등으로 산과 물을 짝지어 말한다. 산과 물이 마을 앞뒤에 있다고 생각해서 배산임수라고 한다. ‘지리산 높이 솟아 우리의 기상, 흐르는 남강 물은 맑고 푸르다. 역사 깊은 진양성 굽어 보며는…’ 진주의 한 고등학교 교가이다. 진주 사람들은 남강이 적셔주는 땅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멀리 우러러보이는 지리산을 정신적 근원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촉석루에 오르면 남강 건너편 조금 남은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 온 세상이 움츠린 겨울철에도 대숲은 푸르고 생생하다. 남강변이 백사장과 대나무 숲으로 어우러졌던 백사청죽(白沙靑竹)의 시대에 진주를 방문했던 사람들에게 강변 대숲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남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대숲이 사계절 발하는 생기를 진주의 인상적인 풍광으로 기억하고, 돌아간 뒤에도 자주 화제에 올렸다.

1910년 장지연은 진주의 세 가지 뛰어난 자랑거리의 하나로 풍부한 물산,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와 함께 무성한 대숲을 들었다. 이처럼 진주 남강의 대숲은 진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고 남국의 매력이었으며, 진주성과 함께 남강과 어우러진 진주 천년을 증언하는 경관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주를 ‘동쪽의 물산이 풍요한 고장(東方之陸海)’이라고 평했다. 하천의 합류지에 입지해 들판이 넓고 토양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한 득수형(得水形) 입지의 장점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득수형은 홍수를 항상 안고 살아야 했다. 엣 농경사회에서 좋은 거주지란 산세와 물길이 잘 어울린 곳, 곧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땅이다. 진주는 산으로 둘러싸고 물길을 끌어들이는 장풍득수를 갖췄지만, 득수에 치우쳐 홍수에 매우 취약하므로 수해를 방지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남강 변에 조성된 대숲 임수(林藪)는 조선시대 남강 제방을 강화하는 비보 시설이었다.


 

해동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표현된 장풍득수의 진주


촉석루에 걸린 시판에는 남강의 대숲을 찬미하는 내용이 많다. 하연은 한여름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 주는 시에서, 대나무 부채에서 이는 시원한 바람은 내고향 청강(菁江·남강의 엣 이름) 촉석루에서 온 줄 알라고 했다. 박융은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맑은 물가에 둘러선’ 남강의 신령스런 생기 덕택에 진주에 인걸이 많다고 지령인걸(地靈人傑)을 노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은 남강을 바라보며 도도히 흐르는 물결이 마르지 않듯이 죽을 수 없는 정신으로 호국을 맹서했다.

남강에 무성했던 대숲은 수백 년간 진주 사람들이 애정과 긍지로 지켜온 인공림이다. 임진왜란을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자 남강 숲은 베어지고 황폐해졌다. ‘진양지’에 ‘옛날 흥성하던 시대에는 숲을 잘 기르고 벌목을 엄금해 산천의 비호와 맑은 기운이 진주에 모였다. 그 시절 진주에 인재가 무성하고 재상이 배출된 것이 이 신령한 기운의 효험이 아니었겠느냐. 도선이 ‘숲이 없어지면 고을이 망하고 또 누각이 높으면 또 고을이 망한다’ 했는데 세월이 흘러 기강이 해이해져 임수를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인물이 쇠잔하고 관계 진출도 전과 같지 않다’고 했다.

촉석루 기둥에 달린 시에 ‘남강 물에 푸르게 비치는 총총한 대나무와 향기로운 난초(叢竹芳蘭綠映洲)’는 강변 임수에서 느껴지는 활발한 생기가 사람에게 감응하여 인물을 융성시킨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남강의 숲은 수해를 방지하는 효과 뿐 아니라, 생기 충만한 진주 남강의 아름다움을 대표하고, 그 생기가 인걸을 배출한다는 상징 경관으로 중시됐던 것이다.


 

남강 대숲이 그려진 18세기 진주 지도(조선후기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1970년대 남강댐과 낙동강 하류 제방이 정비되기 전까지, 진주를 비롯한 남강 하류 지역은 매년 반복되는 홍수에 시달렸다. 진주에서 시작하는 남강 유역과 낙동강 하류 지역은 해발고도 10m 내외의 낮은 저습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낙동강 하류는 유로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고 곡류가 심하다.

또 하류의 삼량진과 물금 사이 낙동강 수구 구간은 강폭이 불과 500∼880m의 협곡으로 상류에 비해 매우 좁다. 낙동강 상류인 경상북도의 년 강수량은 900-1000㎜이지만, 경남을 흐르는 남강 유역의 강수량은 1,300㎜에 달한다. 남강이 전체 낙동강 유량에 차지하는 유량은 평소에는 27%이지만, 홍수 시에는 무려 42%에 달해 남강 유역이 홍수에 더 취약하다. 홍수가 되면 협소한 낙동강 하구 부근에서 병목 현상을 이루어 물 소통이 어렵고 역류 현상까지 나타나 낙동강의 수위가 급상승했다.


 

경남 지역의 낙동강.


남강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가 자주 발생한 대표적 지역이 진주였다. 강변 숲과 같은 전통적 방안은 남강 홍수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되지 못했다. 남강 홍수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책은 이미 조선시대에 제안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1796년 장재곤이란 백성이 진주 너우니(廣灘)위쪽에 제방을 만들고 방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낙동강 하류 일대가 홍수의 위험에서 벗어나 좋은 농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구상은 기발하고 탁월했으나, 시대를 너무 앞서서 실현 불가능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부터 농경지를 확충하기 위한 낙동강 치수 사업을 추진했다. 이 때 남강의 홍수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 대책으로 ‘남강방수로사업’이 제기됐다. 남강에 댐을 쌓고 사천만 쪽으로 인공방수로를 뚫어서 홍수 때 강물을 사천만으로 빼내는 사업은 1936년 진주읍이 완전 침수되는 대홍수를 계기로 착수됐다. 1937년 10월부터 나동면 유수리 분수계의 낮은 언덕에서부터 인공 방수로를 굴착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남강이 사천만으로 흐르는 가화천과 분수계를 이루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넘어 가흥창으로 세곡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장래를 예견했던지, ‘수통골’ 혹은 ‘무너미’라고 불렀다. 물이 통할 수 있다는 ‘수통골’, 물이 넘어갈 수 있다는 ‘무너미’가 현실이 된 것이다. 1945년 해방 당시까지 공정은 70%였다.

 

1933년 남강홍수로 침수된 진주읍내(진주시청 홈페이지)


남강댐과 방수로 공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다시 시작됐으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중단됐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사업으로 남강다목적댐이 채택돼 본격적으로 착공됐다. 다목적댐은 전력 개발과 홍수 통제를 포함한 용수 관리를 하나로 묶는 수자원 종합 개발이다. 1970년 1차 준공된 남강다목적댐은 남강에 높이 21m의 중력형 콘크리트 댐을 쌓고, 삼계리 쪽으로는 방수로를 개척해 가화천을 따라 사천만까지 인공 방수로를 개설했다. 홍수 때 사천만 방수는 높아진 남강의 수위를 낮춤으로써 제방 건설로 강폭이 좁아진 남강 하류의 범람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는 방안이다. 남강 댐과 방수로 건설로 홍수 시 진주 시가지의 안전이 보장되며 남강 하류 범람원 일대에서 안정적인 주거지와 농경지가 추가 확보되었다. 더해 남강댐에서 전력까지 생산하게 됐다.

 

1차 완공된 남강댐(http://www.archives.go.kr)


물 수요의 증가와 홍수조절 능력 증대에 대처하는 남강댐 숭상 공사가 2001년에 완료되어 댐은 31m로 높아졌다. 남강댐 제수문은 하류의 홍수 조절을 위하여 산지 분수령을 절개하여 강물을 곧바로 사천만 쪽 바다로 배출하는 시설인데. 국내에서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근대적 치수 문화유산이다. 2차에 걸친 남강댐 축조로 남강 일대의 홍수 위험이 거의 사라졌다. 실제로 1987년 7월 16일 태풍 셀마가 기습적으로 서부 경남을 강타했을 때 남강댐 상류의 거의 모든 교량이 유실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그러나 홍수를 사천만으로 방수함으로써 진주시에서 남강이 범람하는 사태는 없었다.
 

남강댐 제수문(사천만 방수로)


20세기 진주의 최대 사건은 남강댐 건설이었고, 남강댐으로 진주는 새로 태어났다. 남강댐 건설은 진주시 전체의 토지 이용과 경관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1970년대 이후 백사장이었던 장대지구(장대동 일대), 상습 침수구역이었던 서부지구(봉곡동, 상봉서동), 고속도로 개통으로 신시가지가 형성된 칠암지구, 저습지 자연제방에 ‘큰들’이라는 열촌(列村)이 있었던 상평지구가 차례차례 새로운 시가지가 됐다. 남강댐 숭상공사가 이뤄진 1990년대 이후 신안·평거지구와 호탄지구가 신흥 주거지로 개발됐다. 다른 한편 댐 상류의 경호강과 덕천강 유역, 특히 대평면 경호강변의 비옥한 들판은 거의 수몰되었고, 다수의 이주민이 발생했다.

 

수로가 고정된 진주 남강


현재의 남강은 수량의 차이도 크지 않게 정해진 물길을 따라서 사철 얌전하게 흐른다. 그러나 50년 전까지 남강은 물길을 바꿔가며 넓은 강폭을 만들었다. 자유롭게 흘렀던 이 강물은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으로 칭송됐다. 이제 촉석루에 올라도 우거진 대숲이 강물에 비춰서 살아 있는 그림 같은 옛 경치는 찾을 길 없다. 남강은 제방 속에 갇혀진 갑갑한 도시형 하천으로 변했다. 남강댐과 견고한 제방이라는 자연개조 사업은 진주를 홍수에서 해방시키고 시가지는 확충됐다. 자연과 조화로운 ‘흰 모래밭과 푸른 대숲’의 진주 남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옛 진주성이 복원돼 현대 진주의 값진 유산이 된 것처럼, 강변 대숲이 귀중한 문화생태 유산으로 부활하는 꿈을 꾸어본다.
 

김덕현



남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굽어치는 강이다. 사진 오른쪽 남강댐에서 방류된 강물이 진주 도심을 휘감은 뒤 왼쪽 하류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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