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0)
돈만 있으면 송아지를 되 사오고 싶었다는 용재의 말을 듣고 어른들 모두 굳은 표정으로 응답을 못했다. 마음은 충분히 그러고 싶지만 선뜻 동의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심기를 아이들도 이해하면서 식구들 모두 안쓰러운 어미 소 유월이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양지는 기특하다는 말 이상의 든든함을 그 아이 용재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느꼈다. 그 아이는 단연 우뚝했다. 그 집 사람들, 보잘 것 없는 그 집 사람들과 그 환경 모두가 그 아이를 그 아이답게 길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이구 우리 집 선부가 그예 일냈네. 인제는 할미도 할배도 눈을 감고 가것네’ 하며 뜻밖에도 이모인 양지를 대동하고 나타난 손자를 보고 감격한 안노인의 넋두리는 메말라 있던 양지의 가슴에도 사르르 윤기가 돌게 했다. 누구에게도 쏟아본 적 없는 자신의 감정에 양지 스스로도 놀라움이 컸다. 왜인지도 모르면서 이상한 힘에 이끌려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심경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후지고 둔탁한 원시의 토양에서나마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조카들, 그만해도 충분한 위안이고 희망인거였다. 그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샘물이 되는 것도 아주 뜻있는 역할일 것이다.
은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지는 시장으로 가서 갓 쪄낸 찰옥수수 세 개를 샀다. 이 음식을 좋아하는 식구 누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건을 고르고 돈을 지불하는 흐뭇함의 감미로운 경험도 한다.
귀남이는 저쪽 벽을 향한 채 누워있었다. 배가 등에 붙은 홀쭉한 허리를 보니 ‘너 좋아하는 옥수수 어서 먹어라’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복잡한 나날들을 생각하면 편히 쉬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어쩌면 먹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시간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귀남의 머리맡에다 소리 없이 옥수수를 놓아두고 목장에서 입는 일복을 갈아입었다. 단추를 꿰다말고 양지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답잖게 성실하고 늠름하던 용재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던 것이다, 역시 송금을 잘했다 싶었다. 혈연이란 참 묘한 관계라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한 가족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또 다른 가족. 양지는 흘끔 귀남이 쪽으로 돌렸던 눈길을 걷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사 옆에 있던 공간을 방으로 꾸몄던 것이라 넓이는 두 사람이 살기에 별로 불편함은 없었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은둔자처럼 살고 있던 때에 비해 귀남이까지 달고 들어온 지금은 마음이 배나 더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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