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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공동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13>한국 최초 지방신문 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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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3  22: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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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2017
2017년 현재 경남일보 사옥.


◇호국의 성지 진주성에서 탄생

1909년 10월 15일,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지방신문 ‘경남일보’가 창간된 날이다. 신문은 당시 경상남도 도청이 있던 호국의 성지 진주성에서 찍었다. 경남 진주군 진주면 성내 1동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신문은 ‘황성신문’, ‘뎨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대한민보’ 등이었으나 모두 서울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한 중앙지였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사람이 밀려오면서 부산 인천 등 주요도시에 일본인 신문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드는 신문은 없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에서 1906년 6월 ‘영남신보’를 만들기로 하고 신문 발행허가를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7년 6월 평양에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문사를 세우고자 했으나 역시 무산됐다. 대구에서는 그 뒤에도 1908년과 1910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추진했으나 끝내 뜻을 펴지 못했다.

대구와 평양의 신문 발간 움직임은 진주의 유생·유지들의 관심을 갖게 해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데다 경남도청 소재지로서 나라와 겨레를 있게 한 호국 충절의 고을이자 불의에 굴하지 않은 저항정신이 충만한 유서 깊은 전통의 도시라는 자긍이 경남일보 창간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신문의 발기에서 발간까지

신문사 설립은 1909년 초부터 울산의 재력가인 김홍조(金弘祚·초대 사장), 진주 강위수(姜渭秀·2대 사장), 정홍석(鄭鴻錫·3대 사장) 등 실업가와 유지들이 재산가 김기태(金淇邰)를 임시사무소 소장으로 선임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주식회사 형태에 자본금 3만 원, 1주에 50원씩 600주를 발행키로 하고 자본금 모금에 들어갔다. 시세로 쌀 1섬에 10원 안팎이었으니 1주는 곧 다섯 섬 정도였다.

신문 발기과정은 황성신문이 상세하게 보도했다. ‘대한우일보(大韓又日報)’라는 제하에 ‘경상남도 유지 제씨가 경남일보사를 설립하기로 발기 하였다더라’(2.17)고 한데 이어 ‘영남서광(嶺南曙光)’이라는 제하에 경남일보주식회사 발기문을 전재했다. 발기문은 ‘어둡고 어리석은 국민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키는 데는 신문이 그 기본이 되니 신문사의 창립에 찬성하여 경상남도의 교육과 실업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라며 ‘신문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영남의 바람이요 희망이 아니겠는가’(2.21)라는 요지였다.

또한 ‘대(對) 경남일보 창립에 충고함’이란 사설(2.23)을 통해 ‘영남 산천에 봄날의 우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고 새벽별이 떠올랐으니 이를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충고한다’며 ‘지방에서 신문사를 창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경상남도 유지들의 분발과 노력으로 반드시 성공하여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증진시킬 것으로 생각한다’고 격려했다.

같은 해 창간한 대한민보는 ‘경남일보 청인(請認)’(6.22)을 통해 ‘신문사에 필요한 자금은 진주를 중심으로 모으고 있고…, 경남관찰부를 통해 내부 인가를 얻어 발행한다니 한국인이 지방에서 신문사를 설립하는 것은 경남일보가 효시가 된다’고 해 신문허가 청원을 알리고 있다. 6월에 청원한 내부 인가는 8월 19일에 이뤄졌다.

신문 발행허가를 얻자 발기 주역들은 필수적인 인쇄시설 확보에 나섰다. 인쇄시설은 홍천·안성군수와 경흥부윤을 역임한 김영진이 주도적으로 활판인쇄소 겸 출판사였던 서울의 우문관 시설을 사들였다. 신문을 창간하려던 것이었다. 인쇄시설 확보도 황성신문과 대한민보가 같은 날짜(9.15)에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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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주필 장지연 초빙

인쇄시설을 확보한 주역들은 편집을 주관할 주필에 장지연(張志淵)을 초빙했다. 경남 지역에서는 신문 편집에 경험을 지닌 인물이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활동한 저명 언론인을 초빙해 신문의 성가(聲價)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장지연은 1902년 이래 황성신문사장으로 재직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썼던 당대의 대표적 언론인이요 저술가였다. 이 논설로 1906년 2월까지 경무청에 구금 됐다가 석방돼 사장직을 내놓은 후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와 같은 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휘문의숙장(徽文義塾長)과 평양의 일신학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활동과 저술을 했다. 1908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주필을 맡았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해 있었다.

 


◇창간과 주지(主旨)

신문사를 발기, 발행 허가를 얻어 인쇄시설 확보하고 주필을 초빙한 경남일보는 10월 15일 겨레의 이목과 축복 속에 창간호를 선보이며,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주식회사 신문사, 최초의 지방신문, 지방에서 최초로 근대 활판인쇄시설을 갖춘 출판 겸 인쇄소라는 세가지 ‘최초’ 기록을 보유하며 출범하게 됐다.

황성신문은 즉각 ‘독경남일보(讀慶南日報)’라는 사설로 ‘깊어가는 가을 멀리 남쪽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새벽별이 떠오르는 듯, 횃불이 사방을 두루 비추는 듯한 문명기관”이라며 “곧 우리 겨레의 어진 스승이며 겨레의 경종(警鐘)이요 복리일 것이니 열심히 구독해 분연히 일어설 지어다…’라고 격려했다. 전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축사가 답지해 여러 날 지면을 장식했다. 축사를 보낸 인물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와 겸곡(謙谷)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해 내각총리·궁내부·내부·법부·학부·농상공부 대신과 내각서기장, 평남·북 관찰사를 비롯한 전국의 관찰사와 한성부윤, 중앙의 정치 사회단체장, 경상도 각 군수와 학교장 유지 등이 축하의 글을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중국 호남인 황국영(黃國英)과 일본에 유학 중인 장택상 등이 해외에서 장문의 축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 가운데 황성신문 주필과 사장,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고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박은식은 ‘융희 3년 10월 15일은 경남일보가 탄생한 날이다. 이때에 샛별이 촉석성 하늘에 나타나 달과 같이 반짝반짝 밝게 비추어 장차 삼천리 집집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를 남쪽으로 합장하고 절하며 ‘이 별이 대한 문명을 밝힐 상서로운 별이구나.’하고 말할 것이로다…,’라며 ‘남녘의 나침반이 돼 어둠을 헤매는 이 없도록…, 동포의 문명 사상 증진과 교육과 산업발전과 애국정신을 계도할…, 신문사로서 부강한 나라의 튼튼한 기초를 다져나갈 경남일보에 무한한 축하를 보내노라’고 했다.

신문의 주지는 ‘민지개발’과 ‘실업 장려’로 압축시켰다. 대한 제국 말기에 전개된 항일운동의 하나가 애국계몽운동이었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실력을 양성하거나 언론을 통해 국민의식을 일깨우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의미보다 암매한 지방민을 깨우침으로써 지식수준을 높이고 농업·공업·상업 등 실업을 장려해 교육과 실업을 통해 힘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2017112701010009046_경남일보-한옥사옥(본성동)
1950~60년대 진주시 본성동에 있던 옛 경남일보 한옥 사옥(현 성수장 부지). 이후 당시 대주주였던 럭키금성(현 LG)이 현대식 건물을 올렸다. 1980년 신군부 언론통폐합으로 경남일보가 강제 폐간돼 건물 주인이 바꼈다. 1989년 복간당시 경남일보는 상평동 부지에 사옥을 짓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9년 창간 당시 사옥은 진주성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술국치 전후의 수난

일간 형식을 취하며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설비의 잦은 고장으로 1910년부터 격일간으로 바꾸면서 점차 안정돼 신문의 배포선이 함경도 평안도와 제주에 이른 전국망을 형성했으며 광고도 서울 인천 부산 평양 진남포 경성 등 전국적 분포를 보이면서 업종도 서적 약품 재봉틀 염료 인쇄 병원 잡화 포목 정미소 학생모집 부음 등 점점 다양해졌다.

1910년 6월에는 신문사 새 사옥의 성대한 낙성식을 갖는 등 제자리를 찾으면서 편집실과 사무실 요원을 공개채용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언론 탄압은 더욱 거세져 사전 검열과 발매금지, 압수, 정간 등에 의한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경남일보에 대한 검열 자국인 ‘벽돌신문(활자를 거꾸로 시커멓게 말뚝활자로 조판한 지면)’이 등장한 것은 1910년 1월 31일자 사설 ‘고대한인(告大韓人) 각 신문사’ 제하에 ‘경남일보 기자 배고(拜告) 아(我) 대한인 각 신문사 기자 제군 좌하’라는 부제만 살아 있는 것이었다. 본문 64줄이 깡그리 말뚝활자로 조판돼 있고, 같은 날짜 잡보 란에도 제목조차 뭉개진 37줄이 까맣게 짜여 있다. 3월 4일과 6일자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관련된 기사와 5월 20일과 22일자 이재명의 변론부분은 내용을 알 수 없도록 띄엄띄엄 몇 자만 살려놓거나 말뚝활자로 삭제시키는 등 탄압의 강도를 더 높여갔다.

급기야 8월에는 2일 뎨국신문을 폐간시킨데 이어 27일에는 황성신문을 한성신문으로 강제 개제했다가 폐간시켰으며, 28일에는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개제해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삼았다. 국치 후 31일에는 대한민보마저 강제 폐간시키는 등 국권 침탈을 전후로 중앙 민족지를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이로써 나라 안에 국문지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진주의 민간지 경남일보만 남게 됐으나 경남일보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 됐다.

이런 와중에 국권을 강탈당한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필 4장’을 10월 11일자에 실어 10일간의 정간 처분이라는 수난으로 창간 1주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신문 본연의 기능인 사설을 없애고, 충신·효자·열녀·절사 등을 소개하며 선량한 풍속을 가꾸던 고정란 ‘삼강(三綱)의 일사(逸史)’ 등도 폐지시켰다. 신문의 입을 틀어막고 고유 전통 문화를 지면에서 말살시킨 것이다.

◇강제 폐간

경술국치를 전후 중앙 민족지가 모두 강제 폐간된 뒤 유일한 지방 민간지로서 무단 헌병통치 아래 정간을 당하며 폐간 일보 직전에 이르는 등 압수와 발매금지 삭제로 이어지는 수난 속에 ‘벽돌신문’을 간행하면서도 풍전등화 같은 잔명을 이어오다 1914년 7월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강화된 언론탄압으로 1915년 1월 강제 폐간됐다.

한편 주필 장지연은 1913년 8월에 사임하고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과 강전이 뒤를 이었다. 경남일보는 광복과 더불어 불사조처럼 1946년 3월 1일 반공·반독재·반부패를 사시로 중창간돼 한국전쟁과 4.19, 5.16 등 격변기를 지켜보며 ‘향토의 횃불’임을 자임했으나 1980년 11월 25일 신군부에 의해 ‘한국신문협회 자율 결의’라는 미명 아래 두 번째 강제 폐간을 당했다가 1989년 11월 25일 거듭 복간돼 오늘에 이른다.



※사진은 창간 1호, 경남일보 구 사옥(기와집) 혹은 성수장 자리 사옥


 
10-15-1
1909-10-15-창간 1호



 
gn20170401장일영국장님 (2)
장일영
▶필자약력
전 경남일보 논설위원(전 편집부국장)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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