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5)
  • 경남일보
  • 승인 2017.11.0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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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5)

명자를 보내놓고 양지는 사무실 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명자는 그저 그렇게 과거의 다리위에서 같이 놀 상대는 아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안고 찾아왔고 잊어서는 안 된다고 무언의 압력을 넣으면서 가닥이 잡힐 때까지 양지네를 성가시게 할 것이다. 양지는 전처럼 기갈 성성한 오기도 부리지 않고 침묵상태로 들어 넘겼다. 그때는 분명히 어떤 적개심 때문에 치를 떨었다. 족보를 손에 들고 ‘이깟 한 묶음의 기록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때문에 저질러지는 인간이하의 행위들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멸시 당하고 핍박받던 여인들의 후신인 내가 그 소명을 다하리라. 여자를 울리고 여자를 홀대하는 그 비인간적인 기록의 허위를 내가 소멸시켜 주리라.’ 오직 그 생각만을 타는 불길처럼 활활 태우며 오래 된 한지 첩을 한 권 한 권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 누구도 십 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족보를 입에 올려 본 적은 없었다. 존치 이유가 알쏭달쏭한 기록이라는 양지의 생각을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말이다.

명자가 남기고 간 여운을 걷어내기 위해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이물감을 완상하고 있는데 고종오빠의 전화가 왔다.

“여기 아, 그 뭐 무슨 서방이라 해야 되나? 그 와 안 있나, 호남이 동생 남편, 그 사람이 여어 왔는데 호남이 동생 그게 있나?”

옆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는 낮은 목소리로 고종오빠가 말했다. 호남의 전 남편이 무슨 이유일까.

“아니요. 그런데 호남이는 왜 찾아왔대요?”

“술이 잔뜩 취해서 뭔 소린지 종잡을 수도 없이 시부렁거리는데, 호남이 동생이 주기로 한 생활비 받을 날짜가 넘었는데 안 준다나 어쨌다나.”

양지는 송수화기를 든 손에다 자신도 모르게 힘을 넣었다. 언젠가 술 취한 호남으로부터 주영아빠 인생이 불쌍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그저 같이 살던 사람의 정으로 폐인지경인 그를 입에 올리나 싶었는데 생활비까지 대주고 있었다니.

“호남이 동생도 판단을 잘해야 되겠다. 하는 양이 아주 바람피우는 제 마누라 욕하듯이 하는데 사람이 체면도 뭣도 없어 보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호남이 옛날에 내뱉었던, 그 인간 나 없으면 못산다고 장담하던 말이 얼핏 떠올랐다. 손님들 출입이 번다한 가게에 노숙자처럼 죽치고 앉아 오빠를 곤혹스럽게 하리라 양지는 마음이 편치 않다. 짜증 밴 음성이 절로 나왔다.

“거기는 왜 갔대요?”

“왜긴 왜겠어. 호남이 동생이 자네한테 갔다니까 여기 오면 알겠지 싶었겠지. 그렇지만 내가 곱다시 말 안 들어주니까 저렇게 찡골을 대고 있는 게야.”

“한 달에 대체 얼마씩이나 준대요?”

“그건 안 물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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