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7)
  • 경남일보
  • 승인 2017.11.0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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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6 (537)

우선 상큼한 인상의 소년 용재를 떠올리는 것은 기분조차 상쾌해지는 희망의 다른 모습이어서 좋다. 그러나 천방지축 제 맘대로 날뛰어야할 청소년을 가두고 있는 갈대밭 같은 어려운 환경을 떠올리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졌다.

“어제 새벽에 용재 전화가 왔어. 제 엄마가 쓰러졌다는 거라.”

컵을 든 양지의 손끝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종잡을 수 없는 전말에 대해 심장이 멎는 듯 한 긴장이 왔다.

“다행이 큰일은 없었는데 구급차가 조금만 늦었어도 큰 일 날 뻔 했어.”

“그래서?”

“그래서는 뭐야 당연히 입원이지.”

“뭐야? 그러고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했어. 지금도 먼저 해야될 말이 그건데 말 안했잖아.”

“언니한테 말한다고 뭐 가슴 아프기만 하지 별 뾰족한 수 있어? 입원 잘 시켜놓고 간병인도 붙여놨으니까 됐어.”

언니가 안다고 뭐 뾰족한 수 있느냐는 호남의 말이 심장을 콕 찔렀지만 틀리는 말은 아닌 탓에 양지는 잠자코 천천히 술을 마셨다. 타는 듯이 코끝이 아렸다. 술로 적시지 않으면 갈해진 목젖이 찢어지게 기침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해놓고 보니 너무 함부로 말했다 싶었는지 호남이 흘끔 양지의 눈치를 살폈다. 잘난 척 도드라진 아미를 슬쩍 비비던 손으로 다시 양지의 컵에다 술을 붓고 손대기 좋도록 안주를 돌려놓기도 한다. 양주 한 잔 가지고 올까? 필요 없는 친절도 곁들였다. 양지는 성대가 열리지 않아 고개를 가로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낼모레 결과 보러 같이 갈 거라 그랬으니까 제깍 보고 안한 거 가지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 안했으모 좋겠다. 가만 보면 언니도 늙은이 같애. 용렬하고 조급하고 잘 삐치고. 나이 많은 사람들 대개 그렇게 변한다며?”

사과 비슷한 말을 했지만 양지가 대답을 않자 호남이 버럭 짜증 난 음성을 지어 내뱉었다.

“에이, 사는 게 왜 다 이 모양인지 몰라. 하루 좀 괜찮은가 싶으면 이틀이 못가.”

“의사는 뭐래?”

“며칠 있다 검사 결과 나오면 다시 면담하기로 했으니까 수술날짜든 뭐든 그때 결론이 나오겠지. 답답하다. 우리 다른 얘기하자.”

호남이 지루한 듯이 기지개를 켰다. 마치 ‘너랑 그만 마주보고 싶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녁 영업할 사람들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얼비쳤다.

“그럼 나 갈게.”

양지는 일어설 준비를 갖추었다. 처음 올 때는 오빠네 손자가 이곳에 와서 수연이처럼 남의 손에 자라고 있는 엄청난 비밀이며 명자가 와서 했던 이야기 등을 같이 나눌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새삼스럽게 꺼내기로는 살갑지않은 분위기가 단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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