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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4>가요 인맥으로 본 진주, 한국 가요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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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8  22: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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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일제가 겨레의 숨통을 죄던 1941년, 참으로 고단하고 암울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이다. 이 노래는 대사가 더 유명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만 늙었더라./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아-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인데, 간주곡 선율을 타고 무성영화 변사조의 구성진 가락이 일제 강압을 피해 불원천리(不遠千里) 떠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요원의 불길처럼 애창되어 단번에 진주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난날 어디를 가서 진주에 살거나 진주서 왔다고 하면 ‘진주라 천리 길’을 안부처럼 물었고, 지금도 촉석루를 찾은 노년들은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흥얼거린다. 불행히도 작사자 작곡가 가수 모두 월북해 오랫동안 금지곡이 되었다가 풀린 탓에 제목만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천리 길’의 고향 진주는 남강이 기름지게 적시며 빚은 ‘영남 제일’의 풍광으로 예로부터 나라 안에 내로라는 풍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멋과 풍류가 흐르는 고을로 이름 높았다. 자연 왕대밭에 왕대 나듯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끼쳐 진주를 예찬한 노래도 많지만, 진주 사람들이 만든 가요 또한 많기에 한국 가요의 산실이요 ‘한국 가요의 고향’이라 일컫는 것이다.    
 한국 가요사에 큰 획을 그어 뚜렷한 자취를 남긴 진주 출신을 보면,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삽입곡으로 우리나라 대표 민요인 ‘아리랑’을 편곡해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최초로 노랫말을 짓고 작곡한 창작가요 ‘강남 달’을 발표한 김서정(金曙汀:본명 영환 1898~1936)을 비롯하여 민요조 가요를 주로 작곡한 ‘노들강변’의 문호월(文湖月:본명 윤옥 1908~1962), 올드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베레모와 아코디언의 ‘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孫牧人:본명 득렬 1913~1999), 가요황제로 추앙받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의 가수 남인수(南仁樹:본명 강문수 1918~1962), 동양의 슈베르뜨로 불린 작사 작곡가 ‘나그네 설움’의 이재호(李在鎬:본명 삼동 1919~1960), 아시아의 지휘자로 칭송 받은 작사 작곡가 ‘안개’의 이봉조(李鳳祚 1932~1987), 영화 음악에서 세 차례나 대종상을 받은 ‘대머리 총각’의 작곡가 정민섭(鄭民燮 1940~1987) 등 영상문화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절에 혜성처럼 등장해 당대를 주름잡으며 한국가요계를 떠받치며 가요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들이다.
 영화 ‘장화홍련전’의 감독으로 데뷔한 김서정은 영화 제작과 시나리오 작가, 변사, 작사·작곡·가수, 바이올린 주자 등 여러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낸 다재다능한 예인으로서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당대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서양 곡의 선율을 빌려 우리말 가사를 붙인 번안가요가 널리 불리던 시절,  자서전적 성격을 띤 영화 ‘낙화유수’의 삽입곡으로 우리말에 곡을 붙인 ‘강남 달’은 영화와 함께 인기 절정이었다. 이렇게 창작가요를 개척한 그는 ‘강남 제비’, ‘봄노래를 부르자’, ‘암로(暗路)’, ‘세 동무’, ‘포구의 달빛’, ‘임 찾아 가는 길’ 등 망국한이 서린 노래를 지어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진주 기생이었다.

 

   

윗줄 왼쪽부터 진주 출신 김서정 작곡가(영화감독), 문호월, 손목인, 작곡가 이재호, 아래줄은 왼쪽부터 이봉조, 정민섭, 남인수

 유성기 시대에 민요조 가요를 작곡한 문호월은 1934년 신민요 ‘노들강변’을  발표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반주악단 일원으로 입문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 엔카풍에 영향을 받지 않고, 윤백단의 ‘장한가’로 데뷔한 이래 민요풍 가요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은파의 ‘앞 강물 흘러흘러’, 고복수의 ‘풍년송’, 이난영의 ‘불사조’를 비롯하여 ‘에헤라 춘풍’, ‘봄 아가씨’, ‘봄맞이’, ‘분홍 손수건’ 등으로 신민요의 선구자가 되었다.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김천으로 이주했는데 동향인 남인수와 짝을 이뤄 ‘인생극장’과 ‘천리 타향(1937)’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손목인을 오케레코드사에 입사시켜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케 했다. 

 문호월의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 들어간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와 ‘짝사랑’, ‘사막의 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해조곡’으로 일약 명성을 거머쥐었다. 고복수와 이난영에게는 신예 손목인이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는 김정구의 ‘바다의 교향시’,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 박단마의 ‘슈사인 보이’, 최숙자의 ‘모녀 기타’, 오기택의 ‘아빠의 청춘’ 등 명곡을 남겼다. 중앙방송국 경음악단 지휘자, 영화음악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가요작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가요계의 역사요 증인으로 불리는 이재호는 ‘북극은 오천키로’, 진방남의 ‘세세연년’,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고운봉의 ‘남강의 추억’, 백년설의 ‘복지 만리’,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대지의 항구’, ‘산팔자 물팔자’, 백난아의 ‘갈매기 쌍쌍’ 등 수백 곡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도 이인권의 ‘귀국선’, 금사향의 ‘홍콩아가씨’, 송민도의 ‘아네모네 탄식’, 박재홍의 ‘물방아도는 내력’, 남인수의 ‘산유화’, ‘무정열차’,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손인호의 ‘울어라 기타줄’, ‘촉석루의 하룻밤’,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최갑석의 ‘고향에 찾아와도’ 등 국민가요로 애창되는 명곡들이 그의 손에서 빚어졌다. 
 6.25 전쟁 때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KBS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신진을 발굴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기도 한 그는 작곡에만 머물지 않고 비상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 고향 진주에 대한 망향가인 ‘남강의 추억’, ‘남강은 말이 없네’, 등 많은 노래를 등대수라는 의미의 무적인(霧笛人)이란 필명으로 작사 작곡하였다.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진양호에는 노래비가 있다.
 우리 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는 진주고보 시절 작곡가 이재호로부터 음악성을 인정받아 이 분야에 눈을 뜨게 되어 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또 노래도 불렀다. 남해 출신으로 진주에서 성장한 그는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서 MBC 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는데 국내 작곡가 중 가장 많은 국제가요제 입상 경력을 쌓았으며, 트로트가 주류이던 우리 가요계에 재즈풍 노래를 개척한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동경가요제에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한 정훈희의 ‘안개’, ‘꽃밭에서’,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밤안개’, 현인의 ‘럭키 서울’,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태양’, ‘팔도강산’, 차중락의 ‘사랑의 종말’ 김추자의 ‘무인도’ 등이 있으며, 고향을 노래한 곡으로 ‘향수의 내 고향’이 있다. 대한민국 예술상을 수상했다.
 영화음악에서 1974년과 1978년 1979년에 걸쳐 대종상을 받은 작곡가 정민섭은 진주사범 재학 때부터 음악의 천재성을 보여 작곡집을 펴냈으며, 1963년 관현악곡으로 동아일보 음악콩쿠르 입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을 하여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직접 작사 작곡하고 부인 양미란이 부른 ‘당신의 뜻이라면’,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 이시스터즈의 ‘목석같은 사나이’,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박재란의 ‘박달재 사연’, 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 봉봉의 ‘육군 김일병’, 희식스의 ‘초원’, ‘곡예사의 첫사랑’, ‘아니 벌써’, ‘여고 졸업반’ 등 수백 곡에 이른다.
 영화음악에서는 더욱 두드러져 ‘상록수’, ‘화가 이중섭’, ‘난중일기’, ‘로맨스  그레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일송정 푸른 솔은’, ‘연산군’, ‘돛대도 아니 달고’ 등과 ‘개구리 왕눈이’, ‘아톰’, ‘그레이트 마징가’ 등 추억의 만화영화 주제가들이 그의 곡이다. 
 진주 출신 가수로는 남인수가 단연 독보적이다. 열여덟 앳된 나이에 데뷔한 그는 가요 황제로 군림하는 가객(歌客)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진 부산항’, ‘낙화유수’, ‘황성옛터’(재취입), 등을 불러 나라 잃은 겨레의 설움을 달랬고, 광복의 환희는 ‘감격시대’로 얼싸안았으며, 국토분단의 아픔은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어루만졌고, 6.25 피란민의 애절한 절규도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승화시키며 격변의 고비마다 절절한 노래로 겨레의 가슴을 적셨다.
 ‘꼬집힌 풋사랑’, ‘서귀포 칠십리’, ‘내 고향 진주’, ‘고향의 그림자’, ‘추억의 소야곡’, ‘청춘 고백’, ‘무너진 사랑탑’ 등 1천여 곡을 통해 조국과 겨레, 진주와 남강, 사랑과 눈물, 고향과 이별을 노래하며 시공을 뛰어넘는 불후의 명곡들로 한국 가요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 전국공연단체 연합회장,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진양호 언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진주를 소재로 삼은 노래 또한 많다. 앞서 언급된 여러 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난날 민주화를 외친 젊은 층에 애창된 ‘진주 난봉가’를 비롯해 ‘진양강산’, ‘진주의 달밤’, 황금심의 ‘진주는 천리 길’, 손인호의 ‘원철의 노래’, 이미자와 이동기가 각각 부른 ‘논개’, 나훈아의 ‘진주 처녀’, 은방울 자매의 ‘진주의 소야곡’, 최희준의 ‘진주성’ 등 ‘가요의 고향’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KBS 가요무대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진주 특집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진양호 레이크사이드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재호 노래비.
   
진주 출신 가수로는 남인수가 단연 독보적이다. 열여덟 앳된 나이에 데뷔한 그는 가요 황제로 군림하는 가객(歌客)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을 불렀다. 진양호반 옆 작은 언덕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장일영
▶필자약력
전 경남일보 논설위원(전 편집부국장)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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