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연필로 테두리를 치듯
황광지(수필가)
진한연필로 테두리를 치듯
황광지(수필가)
  • 경남일보
  • 승인 2017.12.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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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지

그믐날인데 만날고개를 오르는 내 마음에 둥실 보름달이 떠올랐다. 연신 얼굴에도 벙글벙글 감출 수 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함께 걷는 나이 든 아이들이참으로 정다운 까닭이었다. 졸업한 지 35년이 지난 S여고 제자들.

여간 뜻밖이 아니었다. 기별 동창회에 가끔 은사를 모시기로 했고 내가 두 번째라고 했다. 나는 당시 담임을 맡지도 않았고 3학년 상업과목을 가르쳤을 뿐이었다. 다만, 인문계 여고에서 여섯 반은 진학반이었고 네 반은 사회반으로 나뉘어 운영된 시기였다. 사회반에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더 열정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그들 편에 서고 싶었고 위로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그 졸업생을 끝으로, 이 학교는 사회반이 없어지고 나는 바로 상업여고로 옮겨 갔다.

만나는 곳도 S여고에서 가까운 만날고개로 정한 것이 더 설레게 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반갑고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도 나를 아주 잠깐 낯설어 하다가 선생님이라고 대번 반기며 손을 잡았다. 한 울타리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보냈던 시간을 되돌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목소리는 중년여성으로 바뀌었지만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니 교실에서의 그때 그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희미하게 그린 그림에다 진한연필로 테두리를 치듯이. 바라보고 있으니 나이 든 아이들 얼굴이 점점 소녀가 되었다. 그들도 시간이 흐르자, 내가 수업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내었다.

제자들에게 줄 선물로 내 수필집을 준비했다. 수필집에는 내가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좋을 것 같아서 서명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었다. 이제 그들도 시어머니가 되고 장모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반장을 했던 영순, 독신인 경희, 청첩장을 들고 온 정현, 꽃집을 운영하는 미자, 큰 사업가라는 현숙, 말숙이와 정자는 울산에서 왔고 현정이는 부산에서 왔다. ‘춘식’이라 개명을 했다는 현정, 사위만 둘 있다는 금순, 순희는 칠서면 복지계장이라고 했다. 대대장으로 날리던 숙아, 경선이는 늦깎이로 학교에 다니고 혜숙이는 수학학원을 운영, 회장 미현이는 신협에 근무하고 있다. 내가 야구장에 자주 간다는 말을 듣고 늙은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자기네 남편들이 야구에 빠져 텔레비전 채널을 움켜쥐고 있는 꼴이 밉다하면서도 공통화제는 좋은가 보았다. 총무 미애는 진행을 깔끔하게 잘했다. 상쾌한 바람이 온몸에 부딪혔다. 35년 숨어 있었던 시간이 되살아나 만날고개의 기운과 어우러졌다. 나는 그들의 앞날을 맘껏 축복했다.

 

황광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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