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43)
양지는 한 나절 내내 심란했다. 아버지는 불이었나. 물이었나. 불이었다면 태워서 말살만 했고 물이라면 실핏줄 같은 수분도 인색했던 나머지 저마저 말라버린 드므였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이웃 아저씨였다면 또는 내 친구나 내 동생이나, 이웃사람이었다면, 그처럼 증오하는 골병으로 내 인생조차 무위하게 흘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을.
양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성실하고 따사로움과는 반대로 춥고 곤고했으며 만행과 폭압으로 군림했던, 그래서 주민들로 하여금 탈주를 지상목표로 삼게 했던 흑역사의 군주로만 떠올랐다. 모든 가족이 자신의 수족으로 인형처럼 부려지기를 바랄 뿐이지 그들의 개성이나 전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자기본위의 사람. 아버지의 질긴 고집, 자존심의 근성이 답답하고 불쌍했지만 마주서면 언행은 항상 뒤틀려 버렸다. 그래도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인연인데, 그의 불가항력을 이해해줄 나이나 식견쯤은 되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해볼 때도 천둥번개나 치던 하늘, 아득한 고산준령이나 옹이처럼 굳어진 인식은 용해되지 않은 실체대로 딱딱하게 곤두섰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맞대거리 할 수 있는 적수로 나의 오기가 되살아나기를 부추기고 있다. 자식은 피지배자이고 자기는 지배자인 용도폐기 된 자기법전을 이참에 은근슬쩍 다시 펼치려는 건 아닌지. 어느 글에서, 자식의 숙명은 영원히 불효자의 멍에에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세월의 배에 실려 가까이 접근해 보지만 부모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그러므로 마음먹고 챙겨 간 홍시는 불효자의 탄식이 된다. 새벽에는 아버지가 먼저 홍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준비된 그릇이 없던 양지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홍시도 먹어 본 사람이 주저 없이 잘 받아먹는 법이므로. 그러나 양지는 이내 과연 내 처지로 아버지를 성토할 자격이나 있는지 착잡한 자괴감에 빠졌다.
잘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 턱없는 연민의 눈이 보여주는 여성들 특유의 약점. 그 비웃음 섞인 안색의 꼬리에는 딸에 대한, 여자에 대한, 거 봐라, 하는 아버지 특유의 남성 우월성 경멸이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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