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4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43)
  • 경남일보
  • 승인 2017.12.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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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43)

양지는 한 나절 내내 심란했다. 아버지는 불이었나. 물이었나. 불이었다면 태워서 말살만 했고 물이라면 실핏줄 같은 수분도 인색했던 나머지 저마저 말라버린 드므였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이웃 아저씨였다면 또는 내 친구나 내 동생이나, 이웃사람이었다면, 그처럼 증오하는 골병으로 내 인생조차 무위하게 흘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을.

양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성실하고 따사로움과는 반대로 춥고 곤고했으며 만행과 폭압으로 군림했던, 그래서 주민들로 하여금 탈주를 지상목표로 삼게 했던 흑역사의 군주로만 떠올랐다. 모든 가족이 자신의 수족으로 인형처럼 부려지기를 바랄 뿐이지 그들의 개성이나 전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자기본위의 사람. 아버지의 질긴 고집, 자존심의 근성이 답답하고 불쌍했지만 마주서면 언행은 항상 뒤틀려 버렸다. 그래도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인연인데, 그의 불가항력을 이해해줄 나이나 식견쯤은 되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해볼 때도 천둥번개나 치던 하늘, 아득한 고산준령이나 옹이처럼 굳어진 인식은 용해되지 않은 실체대로 딱딱하게 곤두섰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얼치기 농부는 맹꽁이처럼 부농이나 대농에 대한 꿈만 빵빵하게 부풀렸다. 벼가 아니면, 오직 쌀이 나오는 작물이 아니면 잡초처럼 다른 작물은 인정하지 않는다. 낫으로 괭이로 뿌리째 잡초만 제거하면 그냥 풍성하게 곳간이 차오를 것이라 믿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련만 옹고집 쇠솥은 그저 검은 쇠붙이 구실로만 붙박혀서 전기밥솥 따위에 밀려나고 말았다. 잎이나 꽃을 여자에 비유하여, 영생토록 생산성과 존속의 중임이 그들에게 달렸다고, 촌아낙네도 설파했던 천리를 비웃음 치던 몰락한 상전. 남새밭에다 온갖 채소를 다 가꾸어서 가족들의 수저질이 번다하도록 만든 어머니의 존재감을 인정하고 손 맞잡이 노릇을 했던들 삭은 통나무처럼 버려진 신세는 면했을 것을. 수하를 거느리는 도량은 아랫사람을 많이 품을수록 존중 받을 수 있는 높은 어른의 품격인 것을 아버지가 읽었다고 자랑하는 고서들은 무엇을 전수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맞대거리 할 수 있는 적수로 나의 오기가 되살아나기를 부추기고 있다. 자식은 피지배자이고 자기는 지배자인 용도폐기 된 자기법전을 이참에 은근슬쩍 다시 펼치려는 건 아닌지. 어느 글에서, 자식의 숙명은 영원히 불효자의 멍에에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세월의 배에 실려 가까이 접근해 보지만 부모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그러므로 마음먹고 챙겨 간 홍시는 불효자의 탄식이 된다. 새벽에는 아버지가 먼저 홍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준비된 그릇이 없던 양지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홍시도 먹어 본 사람이 주저 없이 잘 받아먹는 법이므로. 그러나 양지는 이내 과연 내 처지로 아버지를 성토할 자격이나 있는지 착잡한 자괴감에 빠졌다.

잘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 턱없는 연민의 눈이 보여주는 여성들 특유의 약점. 그 비웃음 섞인 안색의 꼬리에는 딸에 대한, 여자에 대한, 거 봐라, 하는 아버지 특유의 남성 우월성 경멸이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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