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잘가요, 그대
황숙자(시인)
[경일칼럼] 잘가요, 그대
황숙자(시인)
  • 경남일보
  • 승인 2017.12.21 14:3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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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또 한해의 마지막에 이마가 닿아있다.

이상하게 마지막이라는 단어에는 서글픔 같은 게 묻어있다.

지난날 열기를 식히기 위해 지붕을 타고 내려온 처마 끝의 고드름을 우두둑 씹어 먹던 그런 쨍한 겨울날은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누면 나눌수록 행복한 게 사랑이라는데 우리 사는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겨울은 얼마나 쓸쓸하고 시릴 것인지.

무엇을 이루기 위해 허겁지겁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때때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게 된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따스하게 한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소중했다는 것을 떠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한 처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갈 방도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

세상일이란 얼었다 녹았다 어지름을 타고 제 심사를 얼마나 곡진하게 풀어내어야 이만하면 되었다 속 시원히 여길 것인지. 삶의 안간힘에서 묵직한 슬픔을 본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누군가의 소중한 위로 속에서 다시 힘을 내서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한다.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사회상을 염두에 둔 모양이다.

“적폐청산이 제대로 이뤄져 파사에만 머무르지 말고 현정으로 나아갔으면 한다”는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은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트는 새벽이 가장 어둡고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밝음은 시작되는 법.

언제 내려앉았는지 아스라한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의 페이지를 다시 써야하는 시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또 해마다 다를 것이다.

사는 게 때때로 속수무책 농담처럼 가벼워질 때가 있다.

마음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찬바람 부는 바깥을 가만히 내다보며 겨울 내내 나는 차를 마실 것이다.

남과 다른 나로 있을 용기. 마음 가는 대로 천천히 깊어져야 겠다.

아쉬움이랄까 회한인가. 저무는 것들은 깃발이 되어 미친 듯이 흔들린다.

흔들리며 흘러가는 모든 것에 차라리 안도한다.

얼었던 것들은 늘 악착스럽고 그대를 떠나는 일은 무척 힘이 든다.

나는 지금 지독한 냉기를 견디는 중이다.

이젠 눈물을 거두고 씩씩하게 안녕을 고한다. 잘가요, 그대. 2017년.


황숙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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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2018-03-09 17:08:47
지난 한해를 잘 보내셨겠지요? 칼럼을 잘 읽었습니다.

전점석 2017-12-30 20:43:10
송년인사가 좋아요. 새해에 복도 많이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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