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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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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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山(晋州城)은 晋州의 풍수적 핵심처
▲ 진양호에서 금산교까지의 S자형으로 흐르는 남강은 진주를 만들었다. 이런 것을 풍수계는 언필칭 음(山)양(江)이 잘 교구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산과 물이 태극형을 함)형국이라 한다. 진주성이 있는 성산(城山, 필자 작명)은 진양호에서 내려온 물길을 막아 구시가지가 형성되게 한 풍수적 핵심처다. 사진은 남강이 천수교(사진 아래 교량)를 지나 진주성(가운데), 뒤벼리(오른쪽)쪽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

풍수가들이 최고의 풍수서로 격찬한 청오경(靑烏經)논리 중 ‘향정음양 절막괴려 차이호리 무이천리(向定陰陽 切莫乖戾 差以毫釐 繆以千里)’란 구절이 있다. 이는 ‘터를 잡아 양택과 음택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길향(吉向)이라고 정한 것이 머리카락만큼 오차를 범해 흉향(凶向)이 된다’는 뜻이다.


과학이 동원되지 않고서야 어찌 미세한 오차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저런 논리의 풍수고전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풍수를 논할 수는 없다.

더운 여름날 먼 길 가는 길손이 잠시 쉬어가려 시원한 그늘을 찾아 앉기 편한 곳을 선호하는 것. 비온 직후 군데군데 물 고인 길을 갈 때 신발을 적시지 않으려 마른 곳을 골라 걷는 것. 칼바람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등산객이 지친 몸을 녹이려 바람막이가 있는 곳을 찾는 것 등은 모두 자기보호 본능이다. 앉기 편하고 쉬기 편한 곳 중에서도 푹신한 소파가 있으면 더 좋고 게다가 탁 트인 전망까지 좋으면 금상첨화다.

이렇듯 장소, 위치 등 좋은 곳을 가리는 상식선의 논리는 누구나 알고 있고 이게 풍수다. ‘풍수지리’란 바람과 물과 땅의 이치를 다스리는 법칙이다.

바람과 물의 피해가 없는 곳 중 사람 살기 좋은 양택지(집터), 사자가 영면하기 편한 음택지(묘터)를 찾는 방법을 구체화한 것이 풍수학이다.

◇택리지, ‘진주는 사람이 살기 좋은 기름진 땅’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를 통해 ‘살 곳을 택할 때 처음에는 지리(地理)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돌아보고 이중 한 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은 못된다’, 또 ‘나라 안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경상도의 성주 진주와 전라도의 남원 구례 등 몇 곳’이고 ‘시냇가에 살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河回)를 첫째로 삼는다’ 고 했다.

이밖에도 ‘진주는 사람살기 좋은 기름진 땅’ 으로, ‘하회는 사람이 살만 한 곳’으로 꼽았다. 과연 진주는 사람이 살기 좋은 기름진 땅일까? 풍수는 대체로 용혈사수향(龍穴砂水向) 즉 지리오결을 토대로 논한다. 진양호에서 금산교까지의 남강변 진주를 풍수적으로 짚어본다.

◇‘성산’은 ‘구 진주시가지 터’ 형성의 핵심 ‘진주성’은 임란대첩의 승첩지

진주성을 이 글에서는 성산(城山)과 진주성(晋州城)으로 나눴다. 진주성을 떠받들고 있는 산을 ‘성산’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진주를 풍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작명이 필수적이고 둘째 임란대첩 승첩지인 역사의 현장인데도 산 이름 없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구 진주시가지 터(이하 구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결론부터 밝히면 성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주대첩을 승첩으로 이끈 것은 성산에 축조한 진주성의 군사적 역할이 컷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산은 구시가지 형성의 풍수적 핵심처이고 진주성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진주의 풍수와 관계가 깊은 덕천강과 경호강은 발원지가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각각 정반대쪽이다. 덕천강은 천왕봉 동남부가 발원지이고 경호강은 천왕봉 북서부 여러 지천이 합류했다. 두강이 합류한 남강은 귀곡동을 지나 망경산을 떠받고 직류했다. 이내 서장대와 촉석루가 있는 성산과 뒤벼리를 다시 떠받고 좌에서 우로 휘어 좌선(左旋)을 하면서 상류로부터 모래를 끌어다 부어 ‘칠암들’을 만들었다.

 

▲ 진주성 앞을 지난 남강은 뒤벼리(사진 가운데)를 만나 좌에서 우로 휘어 지나간다. 상류로부터 모래를 끌어모아 칠암들(오른쪽)을 만들었다.


이후 오른쪽 새벼리를 또 떠받고 우에서 좌로 휘는 우선(右旋)으로 ‘도동들’을 만들고 금산교까지 거침없이 직류했다. 물은 자신이 들이받는 반대쪽 즉 강건너쪽에 만든 땅은 침식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땅을 굽어보며 유유히 흘러가는 남강 환포수(環包水)는 ‘칠암들’과 ‘도동들’의 안전을 담보한다. 성산은 남강물의 비봉산행 직류를 막아 구시가지를 지켜왔고 진주성은 진주대첩에서 군사적요충지역할을 충실히 했다. 망경산을 떠받은 남강은 성산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직류 해 비봉산 기슭을 무지개모양으로 긁고 진행, 지금의 구시가지는 남강 바닥이었을 것이다.

이와함께 천수교 남단에서 진주교 남단 대밭 문화예술회관에 이르는 ‘칠암들’ 테두리는 비봉산쪽으로 많이 올라갔을 것이다. 구시가지는 환포수가 없어도 성산이 있었기에 안전한 땅이고 만약 성산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땅이다. 대홍수시에는 온 세상이 산과 물 뿐. 사람들은 평소 물 빠진 강 언저리가 ‘물의 영역’이자 ‘물의 길’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홍수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농경지(들녘)를 일구고 취락(도시)을 형성해 농경시대를 살아왔다. 산업사회들어 제방을 쌓고 댐을 건설해 물을 다스려 옥토를 만들었다.

◇산은 물을 못 건너고 물은 산을 못 넘는다.


진주의 구시가지를 품도록 개장한 주산을 비봉산으로 볼 때 내룡맥에 위치한 산은 주산(主山)의 뒤쪽으로 부모산(父母山) 조산(祖山) 태조산(太祖山 진주지역의 경우 지리산을 지칭)이라 한다. 산은 물을 못 건너고 물은 산을 못 넘는다. 지리산에서 용맥이 비봉산까지 오는 동안 물길에 의해 단맥된 곳이 더러 있다. 풍수에서는 이런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진주지역 학교 교가에 흔히 등장하는 ‘…지리산 정기 받아…’는 풍수논리대로라면 남강 강북지역 학교는 지리산정기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혹자는 지리산과 비봉산을 잇는 중간에 여러 조산을 등장시키지만 그런 산들이 비봉산의 조산이 되려면 남강이 일단 비봉산 뒤로 흐르고 용맥이 온전해야 한다. 진주까지 온 용맥의 호불호를 접어두고 구시가지를 풍수적으로 보면 배산(비봉산)임수(남강)의 대명당(시가지)형국이다.

하지만 개장 ‘진주의 주산(비봉산)을 만듬’ 을 하여 대명당을 펼쳤으나 환포수 역할을 해야 할 남강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남강은 ‘칠암들’과 ‘도동들’을 향해서는 환포수 역할을 다하고 있으나 구시가지를 돕지는 않는다. ‘칠암들’만 놓고 보면 환포수와 배산임수로 풍수의 전형을 갖췄으나 북향(北向) 배산임수라 아쉽다.

행정구역 통합으로 ‘도동들’의 구 진양군청 자리에 진주시신청사를 건설했으나 풍수적 길흉은 신·구신청사가 비슷하다. 진주의 풍수적 이상형은 상상이고 가정이지만 구시가지 남단에 ‘도동들’을 갖다 붙이고 남강이 아닌 제3의강 환포수가 ‘도동들’을 휘감는 형국이면 좋다.

그리고 주산이 지금보다 크고 높으면 배산임수 대명당 환포수가 어우러져 풍수적 길지라 할 수 있다. 현 상태에서 그나마 진주의 길지라 할 수 있는 곳은 구시가지의 경우 진주여고와 동쪽일부이고 ‘도동들’의 경우는 남강초교일대를 들 수 있다.

◇진주와 하회는 풍수적으로 닮았다

낙동강이 왼쪽 바위산을 떠받는 벼랑 위 부용대에서 하회(河回)마을을 한눈에 조망하듯, 남강이 진주성을 지나가다 왼쪽 바위산(선학산)을 떠받는 벼랑 위 정상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봐도 남강변 진주는 낙동강변 하회마을과 풍수적으로 많이 닮았다. 안동의 S자형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만들었다면 진양호에서 금산교까지의 S자형 남강은 진주를 만들었다. 이런 것을 풍수계는 언필칭 음(山)양(江)이 잘 교구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산과 물이 태극형을 함)형국이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까? 풍수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하회마을에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다녀갔다. 하회는 조선중기 문신 서애 류성룡의 종택을 비롯 마을 전체에 한옥이 즐비한 것은 진주와 다른 점이긴 하다. 하회가 작은S자라면 진주는 큰S자 풍수형국이다. 진주성과 어우러진 촉석루의 수려한 전경 등 유명세가 세계에 알려져 향후 세계적 유명인사가 다녀 갈 것이다.

◇선학산 정상에 소규모 타워를 건설했어야

필자는 2004년 1월13일자 본보 풍수칼럼을 통해 ‘하회에는 강 건너 절벽 위 자연형태의 부용대에서 하회를 한눈에 볼 수 있으나 진주의 부용대라 할수 있는 뒤벼리 암벽은 고도가 낮고 시역은 넓어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없어 아쉽다’ 고 한바 있다.

당시 용기가 부족해 할 말을 못하고 ‘아쉽다’고 한 부분은 뒤벼리 암벽 위에 서울 대구의 남산타워 부산의 용두산타워를 닮은 진주타워를 소규모로 건설토록 시당국에 제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그 시절 산 정상일대 수많은 공동묘지 연고자와 시당국에 부담이 될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아 포기했다. 세월이 지난 후 그 곳엔 조망권을 확보한 휴식공간으로 정비됐고 1층엔 시민건강휴게실 2층엔 산불감시초소로 쓰이는 작은 건물만 들어섰다. 구시가지 칠암 도동지역을 볼 수 있도록 정비한 것만으로도 좋지만 이왕이면 진양호와 금산교까지 볼수 있는 타워로 건설했더라면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성재권
▶필자 약력
경남일보·부산MBC·경향신문 기자
대구한의대학교 풍수학 석사
경상대학교 강사


진양호에서 금산교까지의 S자형으로 흐르는 남강은 진주를 만들었다. 이런 것을 풍수계는 언필칭 음(山)양(江)이 잘 교구된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산과 물이 태극형을 함)형국이라 한다. 진주성이 있는 성산(城山, 필자 작명)은 진양호에서 내려온 물길을 막아 구시가지가 형성되게 한 풍수적 핵심처다. 사진은 남강이 진주성(왼쪽)을 지나 뒤벼리(오른쪽)쪽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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