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 선출직 공무원의 행사 초대
정승재 객원논설위원 한국인권사회복지학회장
[경일시론] 선출직 공무원의 행사 초대
정승재 객원논설위원 한국인권사회복지학회장
  • 경남일보
  • 승인 2017.12.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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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을 지내고 정계를 떠난 한 원로의 회고담이다. 오랫동안 친분을 나눈 지인이 타계했다. 아린 마음으로 상가를 다녀왔다. 상주인 아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나 어느 행사장에서 안면이 익은 사람을 만나 “아버지 안녕하신가” 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그 젊은이는 며칠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는 부친의 성함을 일렀다. 아차! 그때 조문했던 그 망인의 아들이었다. 사람 기억을 못하고 의례적 덕담으로 죽은 사람을 두고 안부를 물었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있나.

몇 번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무총리를 역임한 한 정치인의 술회다. 매일 아침에 용변을 보면서 반드시 5명의 지역구 지지자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미리 가족관계가 파악된 자료를 들고 그들의 아들 혹은 딸의 근황을 묻는 등 살가운 관계유지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쓴웃음이 여미는 또 다른 경험담도 있다. 두 번의 국회의원과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분의 회고다. 현역 장관시절에 많게는 하루 10번, 적어도 3번, 평균 5번의 저녁밥을 소화해야 했단다. 기쁘고 즐거운 행사장에서의 저녁도 있지만 몇 번 더 보지 않을 사람들과의 의례적 참석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영어단어를 온전한 기억속에 저장하기 위해서는 30번의 쓰고 외우는 단계를 거쳐야만 암기된다는 통설이 있다. 사람을 기억하는 기반도 마찬가지다. 각각이 같을 순 없겠지만, 기본적 인연을 두고 정보를 수용하고 저장하여 적절한 때에 발현되는 사람에 대한 기억력은 제한적이다. 행정학에 조직원리의 고전인 ‘통솔범위의 적정화’ 이론도 사람의 기억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있다. 한사람이 통솔하고 관리하는 데는 6-7명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사람을 사귀는 인간관계 틀에 적용하면 이해가 쉽다. 각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을 나누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합한 각계의 주변인이 그리 많을 수 없다는 말로 환언된다.

연말에 송년회 혹은 망년회라는 이름의 모임과 행사가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이 저녁 식사를 곁들인 회합이다. 고향과 학교를 기반으로 하는 향우회와 동창회는 기본이다. 그것도 서울을 포함한 각 지역별로 나눠하는 경우가 많다. 산재한 사회 및 임의단체, 또는 각종의 친목회 수장의 이취임식을 동반한 만찬행사도 부지기수다. 경쟁이 붙어있는 유사한 사회단체간에 과열로 인한 갈등도 흔지 않게 본다.

어김없이 연고 있는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선출직 공무원들을 초대하고 거창한 축사를 맡긴다. 초청받은 그들은 도착 전에 차안에서 보좌진이 마련해 준 주최측 주요인사의 이름과 사진을 대조해 가면서 일시적 기억력을 총동원하여 마음에도 없는 살가운 인사말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진행자는 그들을 소개할 때 “국정(혹은 시정 등)에 바쁘심에도 불구하시고 참석해주신”과 같은 ‘립 서비스’를 기본 매뉴얼로 달고 있다. 가는 곳마다 같은 말을 듣는 참석자들도 한참의 고역일 것이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이런 행사에 잦다보니 초청받은 이른바 고관들은 저녁밥을 너 댓번을 넘기는 리얼한 실제도 나타난다. 인사말이 끝나면 물 한컵도, 젓가락 한번 사용하지 않은 채, 또 귀하다는 다른 일정을 이유로 자연스럽게 떠난다. 다음 참석 장소도 그런 연출의 반복이다.

인식을 바꾸면 좋겠다. 선출직 ‘높은’ 사람의 참석이 체면을 높이고 모임의 빛을 발한다는 생각 말이다. 주최측 임원들에게 더욱, 사람의 일에 왜 불가피한 일이 없겠는가. 마땅히 자신을 뽑아 준 지역민과의 살가운 소통은 필수적이다. 각각이 인간적 정의(情誼)를 위장하며 가식하지 않아도 될 범위를 스스로 정하면 어떨까. 답은 서로가 안다. 복잡다기한 세상살이에 진실이 모자라고 정이 박약한 화학적 악수와 인연이 썩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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