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마지막 왕의 쉼자리 ‘구형왕릉’
금관가야 마지막 왕의 쉼자리 ‘구형왕릉’
  • 원경복
  • 승인 2017.12.1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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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가야문화 유적지 탐방기
▲ 덕양전 전경



문재인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위한 조사연구’를 100대 국정과제로 채택한 이후 가야사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전망이다. 문화재청장도 최근 가야사복원의 기초가 될 ‘가야총서’ 발간과 ‘영호남 가야문화권 유적에 대한 통합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약속했다. 정부는 내년 가야유적보수정비예산 145억원을 책정했다. 경남에 87억원이 지원된다. 경남도도 가야의 중심지답게 지난 7월 전국 최초로 가야사 복원TF를 설치하고 9월에 학계, 전문가 등 17명으로 민간자문단을 운영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산청군이 학술용역을 실시하고 있는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릉에 얽힌 사연을 찾아가 본다./편집자주

일국의 왕이었지만 적국의 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식솔들과 함께 산 속 깊숙이 도망치듯 떠나와야 했던 비운의 왕. 죽어서도 편히 영면하지 못하고 나라 잃은 자신의 죄를 탓하며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 했던 가락국(김해 금관가야) 마지막 왕(제10대) 구형왕의 이야기다.

김해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경북 고령의 대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까지 6개 가야왕국 중 김수로왕에 의해 첫 번째로 건국됐으며, 지금의 경상남·북도 지역에 걸쳐 50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락국의 마지막 왕은 지리적으로 국경이나 다름 없었을 산청의 왕산 아래 작은 계곡으로 들어와 여생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이 같은 이야기는 대부분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로 미뤄 짐작할 뿐 당시 구형왕과 가락국, 가야왕국의 역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아쉽기 그지없다.

최근 고대 왕국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김해를 비롯해 많은 자치단체에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산청군 역시 마찬가지다. 군은 현재 지역의 가야 시대 유적인 생초고분군과 어외산성, 중촌리고분과 백마산성, 구형왕릉에 대한 학술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현황조사와 함께 주변 관광자원과의 연계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다.

그 중에서도 사적 제214호로 지정된 구형왕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마지막 쉼자리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구형왕릉 설경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동의보감촌에서 생초IC 방향으로 조금 더 지나 고갯길을 내려오면 찾을 수 있다.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신 덕양전에서 건물 왼편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오면 왕릉의 입구인 홍살문이 보인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한겨울의 구형왕릉은 왠지 더욱 쓸쓸한 느낌이다.

홍살문 앞에는 구형왕릉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현황 등에 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구형왕릉은 경사면을 따라 피라미드 모양으로 만든 독특한 형태의 돌무덤이다.

나라를 잃은 왕이 자신을 자책하며 ‘돌 속에 묻혀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긴 탓에 이같이 특이한 석조물이 생겼다니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구형왕의 아픔과 절절함이 느껴지는 듯 하다.

구형왕은 양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이름에는 나라 잃은 왕의 아픔이 담겨 있다. 바로 왕위를 넘긴 왕이라는 의미다.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구형왕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도 국왕의 도리’라 생각해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줄 것은 합의한 후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명예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그의 마음이 후대에 전해졌기 때문일까.

구형왕의 자식들은 신라에서 귀족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후에 그의 손자인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구형왕릉에서 내려오는 계곡길 어귀에서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를 볼 수 있었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이 젊은 시설 할아버지의 무덤인 구형왕릉을 찾아 왕릉을 돌보며 무예를 갈고 닦아 삼국통일의 영웅이 되었다고 하니 구형왕의 설움과 한을 손자가 풀어준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

양왕의 아픔이 조금은 가셨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은 또 있다. 구형왕릉을 품고 있는 왕산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이 말년을 보낸 별궁인 태왕궁이 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구형왕은 김수로왕 별궁이 있던 태왕궁지에 수정궁을 짓고 여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구형왕은 시조 할아버지가 계셨던 왕산으로 들어와 나라를 잃은 죄를 용서받고 아픔을 위로받기를 원한게 아니었을까.

다만 현재 수정궁터로 알려진 곳은 수풀이 무성해 표지판이 없다면 알아차리기 힘들고 역사적 검증이 미흡해 조사나 발굴, 보존이 이뤄지지 않은 점은 자못 아쉽다.

가야의 마지막 역사가 담겨 있는 구형왕릉과 왕산의 이야기는 알면 알수록 신비한 느낌이다. 특히 덕양전과 왕산을 둘러보며 만난 그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 같기도 하다.

작은 계곡 한 켠에 수더분하게 자리 잡은 구형왕릉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자니, 왠지 애민(愛民)을 실천한 그의 정신이 신라로 전해져 그 힘으로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이처럼 비운의 삶을 산 왕과 그 자손들이 이룩한 영광스러운 역사까지, 구형왕릉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해 금관가야가 고대왕국 가야문화의 시작이라면 산청의 구형왕릉은 그 마지막 역사를 품고 있다. 아직은 많지 않은 몇 가지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지만 앞으로 추진되는 가야 역사문화 복원사업을 통해 가락국 마지막 왕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원경복기자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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