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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 발길닿는대로(100) 황룡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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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28  23: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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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매산 모산재


기행수필 100회를 쓰면서 많은 감회에 젖는다. 먼저 100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100번을 해 봐라 되나봐라’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골백번을 해봐라’라도 있다. 만 번씩 100번을 하여 본들 이라는 뜻이다. 결국 엄청나게 많은 수 즉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대의 수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100점, 100%, 등 만족의 최대치로 가득 차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8년 동안을 썼으니 8년이라는 의미도 생각해 보면 80인생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다. 2010년 2월 ‘윤위식의 발길 닿는 대로’ 첫 회를 ‘황룡사를 찾아서’를 출발로 8년간을 빠짐도 없이 매월 한편씩을 실어서 100회를 맞은 것이니 감회가 깊다.

관광객 유치에 작은 보탬이 되어보자며 경남권역 안으로만 소재를 잡아달라는 당시 박용진 편집국장의 속 깊은 뜻을 짐작하고 좀은 덜 알려져도 꼭 가봐야 할 곳을 찾아 경남전역을 ‘발길 닿는 대로’ 종횡으로 누볐다. 그러다보니 안 가본 곳 없이 웬만큼은 돌아 다녔기에 어디를 가든 골짜기마다 마을마다 잊혀져가는 옛이야기들이 알토란처럼 묻혀있는가 하면 수난과 질곡으로 얼룩진 애잔한 역사가 곤하게 잠들어 있어 갈피 삭은 옛 이야기책을 읽는 것만 같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애달픈 사연을 되새기며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솔깃하게 하고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사연들하며 길에서 길을 찾고자 길을 물으며 작은 깨달음을 나름대로 엮었다. 산길 들길 헤매며 방방곳곳을 들쑤시고 돌아다닌 거리도 왕복 평균 200㎞로 잡아도 줄잡아 지구를 반 바퀴나 돌은 셈이다.

첫 회의 ‘황룡사를 찾아서’부터 이제 8년간을 헤집고 다닌 끝에 다시 황룡사를 찾아 집을 나섰다. 황매산 모산재의 절경을 짊어진 비경의 절집이 병풍 속의 수묵화 같은데 스물다섯의 서울처녀가 57년 전에 머리를 깎고 오르지 부처님의 가사자락에 육신을 맡기고 속세와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비구니 노스님이 철제 사립문까지 주먹마한 자물쇠로 굳게 잠근 사연을 어찌 하룻밤 이야기로 끝나겠나 싶어 “스님의 이야길랑 다음에 하자. 별이 빛나는 밤 황룡사에서” 라고 1회를 끝맺음 하면서 독자와의 한 약속이라서 길머리를 잡은 것이다.

진주에서 합천방향으로 33번 도로를 따라 20번 도로와 마주치는 생비량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여 상능마을의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 가회면사무소 앞에서 황매산 모산재라는 이정표를 보고 대기마을로 접어들었다. 멀리 수직으로 깎아지른 암벽 암산이 병풍 속의 그림 같이 수묵화로 펼쳐진다. 황매산 모산재이다. 큰길 따라 접어들어 커다란 주차장을 지나 모산재 방향으로 꺾어들면 작은 주차장 앞에 황룡사표지판이 삼거리에 나와서 정중하게 맞이한다. 곧장 차를 몰아서 시멘트 길을 따라 200m가량 올라가면 철제 사립문이 나온다. 수십 년을 두고 주먹마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던 문이다. 8년 전 1회 글을 쓰고 수년간의 내왕을 하고 나서야 비구니 노스님은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으셨다. 참으로 긴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노비구니 지승스님은 세상과 인연의 끈을 다시 이은 것이다.

 
황룡사 잔경
황룡사 잔경


철제사립문 안의 잔디밭에 차를 세우고 절집을 감싸 안은 석벽의 산을 바라보면 여기가 별천지라는 것을 깨달게 된다. 모산재의 기암괴석은 금강산의 만물상을 떠다놓은 듯이 온갖 형상을 한 바위와 천인단애의 절벽과 기기묘묘한 거암거석들이 합죽선의 수묵화인지 공작새가 꼬리 끝을 활짝 펼친 것인지 멋스럽고 장엄한데 석벽을 등지고 앉은 작은 절집 황룡사가 고즈넉이 내려 앉아 도솔천이라 하면 제격일까 불국정토라면 어울릴까 비경이고 선경이라 황홀경을 자아낸다.

곰 같은 놈이라면 호랑이 같고 자라 같다하면 거북이 같아 발길을 옮길 때마다 그 형상을 달리하니 마법의 석산인가 영험한 성지일까, 실쭉샐쭉 골을 지어 희끗희끗 덧칠하고, 들쭉날쭉 겹겹으로 울퉁불퉁 불거지고, 삐쭉빼쭉 솟구쳐서 천불천탑 불국인지, 몽실몽실 동자승이 노송아래 즐비한데, 벼랑위의 바위들은 군웅처럼 우쭐대고, 듬성듬성 솟아오른 수직의 바윗돌은, 우락부락 팔척장신 금강역사 형상이며, 희끄무레한 초막은 영락없는 절집인데, 바랑을 걸머지고 삿갓 쓴 노스님이 모산재를 넘는 걸까, 범바위를 앞세웠으니 황매산 신령일까.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하니 비경이고 절경이라 보는 이의 넋을 뺀다.

절집이 문을 잠그고 사는 사연이야 필자인들 어찌 알았겠냐마는, 마음의 문까지 닫으셨던 노스님이 말문을 연지도 필자와의 내통이 오간지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스믈다섯의 서울처녀가 계룡산 동학사에서 머리를 깎고 절밥 먹은지가 작년이 꼭 57년 전이라 하던 때도 8년이 지났으니 어찌 보면 또 까마득한 옛일이라 세월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계실지가 궁금하여 요사채 앞에서 헛기침을 하여도 풍경소리만 당그랑 거릴 뿐 인기척이 없다.

누더기 한 벌 남기고 이 세상 떠나면 중노릇 제대로 잘 한 거라 하셨는데 정말 누더기 한 벌만 남겨놓고 부처님의 세계로 가시지는 않았는지 조바심이 엄습한다. 적조했던 세월이 죄스러워 귀를 기우리는데‘스르륵’하고 창문이 열리더니 명함판 사진같이 스님의 상반신이 네모난 문틀 속에 단정하게 그득하다. 건재함이 반가워서 얼른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나도 모르게‘나무관세음보살! 소리가 절로 났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붙은 법당으로 들어섰다. 대웅전이래야 정면 한 3칸에 측면 2칸이지만 칸이 좁은데다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덮어 단청까지 화려하여 참으로 단아하다. 법당으로 들면 네댓 명이 들어서면 가득한 크기인데 관음보살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 탱화가 전부이며 줄대에 걸린 스님의 가사가 실내장식을 대신하고 향로와 촛대 한 벌이 관음보살님의 살림살이 전부이다. 헌향삼배의 예를 올리고 대웅전 문을 나섰다.

황매산 기암절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오르지 하늘만을 열어놓은 부처님의 둥지에서, 염송하며 뉘우치고 목탁 치며 인연 끊고, 향 사르며 번뇌삭여 절하면서 속죄해도, 모질고도 질긴 인연 새벽까지 달라붙어, 눈물 젖은 장삼자락 마를 날이 없었으며, 달빛 속에 별을 세며 범종치고 운판 치며, 두드리고 두들겨도 목어소리 법고소리 무심하긴 한결 같고, 법당에 촛불 켜고 평생 동안 무릎 꿇고 이승전승 지은죄업 빌고 빌며 속죄해도, 백팔번뇌 질긴 사슬 마디마디 한스러워, 오르지 부처님의 가사자락에 스님은 육신을 맡기고 속세와의 문을 굳게 닫으셨더니만 법계와 속계의 가름을 허물고 법계도량의 문을 활짝 열어버린 것일까. 스님의 연세도 이제는 아흔이시니 스물다섯에 머리를 깎았으니 법랍 예순다섯이다. 그래도 정정하시니 더없이 고마운데 너무도 깔끔한 성품이라 흐트러짐도 어긋남도 없는 삶이였기에 법랍 예슨 다섯에도 상자하나 두지 못했으니 인연이 닿지 않은 타고난 팔자인가 전생의 업이던가. 엄격한 계율 속에 사미승시절을 보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하셨던지‘동학사로 한번 모실까요?’하여도 내세에도 중이 될 거라면서 고개를 저으신다.수십 년을 닫혀있던 황룡사의 철문은 사바세계를 일깨우는 자비의 문이 되어 활짝 열리었다.

독자제위께 그간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황룡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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