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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택배
황광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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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9  16: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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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지

대전에 있는 지인이 보낸 연말 택배를 받았다. 연하장을 보내려고 우체국으로 가는 중이라며 주소를 문자로 빨리 보내달라고 재촉해 별 생각 없이 보낸 뒷날이었다. 뜻밖의 스티로폼 상자를 받고 매우 어리둥절했다. 연하장이라더니, 상자 속엔 멸치볶음 봉지가 맨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그제야 무릎을 쳤다.

진해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한 그의 집에 내가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성의 있게 식탁 그득히 음식을 장만해 놓았다. 굴을 곁들인 김장김치에다 잘 삶은 돼지수육이 푸짐했다. 요즘 그리 귀하다는 오징어 두루치기에다 버섯소고기 볶음도 먹음직스러웠다. 몇 가지의 나물들은 예쁜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유독 내 입맛을 끈 것이 멸치볶음이었고, 자주 젓가락이 그 접시로 향했다. 호두와 통깨와 물엿으로 버무린 멸치볶음은 보기도 그럴 듯하고, 짜지 않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그는 내 식성을 간파하고 찬통을 가져와 푸짐하게 더 덜어놓았다. 그러자 나는 마음 놓고 멸치볶음을 듬뿍 덜어 밥에다 비벼 먹기까지 했다. 그 집에서 떠나올 때 그는 남은 멸치볶음을 담은 봉지를 내 손에다 쥐어 주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이렇게 민망하지는 않을 텐데. 택배까지 받고 보니 지나치게 멸치탐욕을 부렸던 것이 화끈거렸다. 멸치볶음을 생전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서 측은하게 보였나? 차려준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좋지만, 너무 집중해서 먹는 것은 격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울컥 올라왔다.

아마 지인은 나를 보내놓고 내가 먹는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는가 보다.

밥을 비벼먹기까지 하던 멸치볶음을 푸짐하게 한 봉지 만들면서 다른 볶음 반찬도 한 봉지. 멸치를 먹느라고 수육을 못 먹었을까 해서 돼지수육 한 봉지. 수육과 궁합이 맞는 배추김치와 무김치를 비롯, 얼린 찌개와 미역국 한 봉지가 따라 나왔다. 이럴 어쩌나. 알차게 채워진 택배상자를 열어놓고, 쉽사리 챙겨 넣지를 못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택배를 보낼 생각을 하다니,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나는 죄스럽기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남이 보는 앞에서는 남의 눈에 띄게 먹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나. 먹는 것으로 남에게 짠하게는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 사소한 일 같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여러 날 동안 나는 밥 위에 멸치볶음을 덜어 얹으며, 식사의 품격을 생각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따뜻한 감동과 민망함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황광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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