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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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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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문화 발상지 진주
▲ 진주차례회 중심 인물 4인. 왼쪽부터 아인 박종한,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차농 김재생.

◇진주, 현대 차문화 운동의 시작점

차(茶, cha, tea)는 약으로 애용되다가 차츰 세계인이 즐기는 기호음료가 되었다. 차는 맑고 담백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고 각성하게 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은 하루를 시작하는 설렘과 일과를 마무리하는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쌓인 차문화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이 중심이 되어 쌓아온 귀중한 동양문화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상위문화에서 하위문화로 흐르듯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흐른다. 그러나 차문화만큼은 진주에서 서울로,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서 진주라 함은 진주시를 중심으로 하는 진주목 지역을 말한다. 차 시배지가 지리산이어서 차를 연구하고 차밭을 일구어갈 수 있는 여건이 좋았다. 차도구를 갖추고 차실을 꾸미는 등 차를 즐기는 생활로 이어졌다. 차와 관련된 책자를 출판해 이론적인 바탕도 다져 나갔다. 진주에서 시작된 차문화는 결국 차문화운동으로 확대돼 한국 생활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효당의 한국차생활사

우리나라 차문화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알게 모르게 개인이 조용하게 즐기거나 사찰 스님들이나 수행자들의 심신수련 방편 음료로 마셔왔다. 당시 곤양 다솔사 효당 최범술(1904~1979) 스님이 차에 관한 이론적 체계를 직접 소개하고 강연을 했다. 또 ‘독서신문’과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우리 차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


다솔사 효당이 구술한 차 이야기는 1966년 12월에 ‘한국차생활사(韓國茶生活史)’로 몇 부 등사되었다. 이 등사본은 일본 동경 민단(民團) 간부로 있는 교포 김정주씨 부탁에 의해 효당이 구술한 것을 정서하여 유인물로 만든 것이다. 김씨는 일본 차문화가 부럽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그는 ‘한국에는 차문화가 없는지’ 궁금증을 해소해 달라며 효당에게 간청했다. 이를 계기로 총 24쪽 ‘한국차생활사’는 1966년 12월, 차성 초의 적후(寂後) 백주년을 기념해 다솔사에서 간행되었다. 우리 첫 차책인 ‘한국차생활사’는 1967년 1월에 수백 부가 등사돼 진주, 사천, 하동, 일본 등지로 배포됐다. 차가 사회에 차츰 알려지기 시작하고 지리산을 끼고 있는 하동과 산청에서는 차 생산을 독려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효당은 ‘한국차생활사’ 배포 이후에도 차회(茶會, 차 마시기 모임)을 자주 가졌다. 또 ‘독서신문’에 차론(茶論, 차문화 이야기)을 연재하고 정리한 원고로 ‘한국의 차도’가 나왔다. 1975년 봄에 발표된 ‘한국의 차도’는 우리도 훌륭한 차문화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게 된다.

‘한국의 차도’는 효당이 60여 년 수도 생활과 함께 해 온 차생활이 담겼다. 쉽게 썼지만 달관의 경지가 엿보이는 개론서이다. 이 책으로 차문화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됐다. 한국 차문화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조선시대 한재 이목의 ‘차부’, 초의선사의 ‘동차송’을 넘어 효당의 ‘한국의 차도’는 처음으로 차문화 전반의 체계를 갖춘 한국 차도의 입문서가 되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차에 관한 책이 널리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 효당 최범술이 펴 낸 국내 첫 차관련 유인물 ‘한국차생활사(1966, 24쪽)’와 한국의 차도(1975).

◇오민교육과 차도

여기에 대아고등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아인 박종한(1925~2012) 선생의 차도구에 대한 조형의식과 경상대학교 차농 김재생(1927~2010) 교수의 차나무 연구가 더해져 ‘차정신-차예술-자연’이라는 세 영역 체계를 갖추었다. 또 진주 차인들과 함께 전국적인 차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아인의 조형의식은 ‘오민교육(五民敎育, 배영사 1975)’으로 출판되었다. 아인은 교내에 박물관을 세우고 민속용기를 수집해 오민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용기 속에 스며있는 장인정신과 민중의식을 학생들에게 직접 체험으로 가르쳤다.

차농은 임학과에 재직하면서 차나무 연구와 증식 그리고 일본과 연구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로써 효당의 차정신, 아인의 조형의식, 차농의 차나무 연구 그리고 비봉산 비봉루(飛鳳樓)에서 진주차인들이 차생활운동 체계를 갖추면서 한국차문화운동의 핵으로 작용하였다.
▲ 차 관련 서적. 오른쪽부터 한국의 차도(효당 최범술, 1966), 오민교육(아인 박종한, 1975), 진주시민과 차생활(정헌식, 2001)

◇진주차례회 결성과 한국차인회 창립

막걸리와 다방 커피가 유행하던 시절에 진주 사람들은 차밭을 일구고 차나무를 연구하여 차 향기를 보급했다. 민속박물관을 지어 민속용기와 차도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술보다 차가 괜찮다고 여겨 차생활을 시작했다. 차 이야기도 생겨나 ‘진주 차맛’ 혹은 ‘진주차풍(晉州茶風)’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전통차 마시는 습관을 보전하고 차인들의 결속을 다지고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기 위한 차모임이 만들어졌다. 은초 정명수(1909~1999), 유당 정현복(1909~1973), 아천 최재호(1917~1988), 태정 김창문(1923~2003), 차농 김재생(1927~2010), 우남 문후근(1917~1992), 경해 강명찬(1920~2011), 무전 최규진(1935~ ) 등 몇 분이 발기를 하였다. 고문으로 효당이 있었고 아인은 발기하고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비봉루에 거주하는 은초 정명수가 찻자리를 제공하였다. 회장은 태정 김창문, 총무는 무전 최규진이 맡았다. 차인회는 다른 모임과는 달리 나이, 학력, 지위나 종교를 떠나 순수, 소박해야 한다는 뜻을 세워 열성적인 회원을 임원진에 추대했다. 진주 차인들은 1969년 10월 1일 진주에서 ‘진주차례회(현 진주차인회)’라는 전국 최초 공식 차회단체를 결성했다.

진주차례회는 곧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김재생 교수의 인연을 통해 1970년 4월 1일 일본 나고야 차도회 오모토센케(表千家) 차도사장(茶道師匠) 요시다(吉田) 일행 다섯명을 초청해, 처음으로 한일 차문화 교류회를 가졌다. 대아고등학교 교장실, 다솔사, 남해 하천재를 돌면서 차회를 열었다. 한일 차인들은 이와 같은 차문화 교류를 빈번히 갖자고 제안하였고 차공원(tea park) 건립 의견도 나왔다.

 
▲ 국내 첫 공식 차회 단체인 진주차례회(현 진주차인회)와 일본 나고야 차도회는 한일 차문화 교류회를 열고 교류를 이어갔다. 사진은 1970년 첫 한일 교류회 당시 다솔사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효당이며 왼쪽 안경 쓴 사람과 여성은 나고야 차인회 요시다 회장 부부.

◇전국 차모임 ‘한국차도회’ 탄생

차생활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차생활에 대한 호기심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전국적인 정식 차회 모임은 없었다. 이에 진주차인들과 다솔사를 중심으로 전국 규모 차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설립 목적은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다. 차생활을 통하여 그 젊음의 열기와 객기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조화로운 생활이 되도록 한다. 또 그 참된 가치관을 세워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돕고, 그리고 기성인들은 기성인들 나름대로 차생활을 통해 각박한 삶에서 적절한 심신의 조화를 얻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루는 데 한 몫을 하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1977년 1월, 전국 각지에서 50여 차인들이 참석해 15~16일 이틀간 회의 끝에 다솔사 큰방 죽로지실에서 ‘한국차도회’가 결성됐다. 본부는 효당이 머무는 다솔사에 두기로 하고, 지부는 진주·부산·대구·광주·서울·대전 등지로 우선 설정해 놓고 차츰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당시 다솔사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큰 단체를 움직일 힘이 부족했다. 그러나 꾸준히 차생활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 가운데 전국 단위 단체를 움직일 힘이 요청되었다. 한국차도회 몇 명은 뒤이어서 결성된 ‘한국차인회’ 발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효당은 병환으로 뒤에서 자문 역할을 하였다. 아인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 재건사업과 함께 중요한 안건을 맡아 추진했다.

서울 오류동 별장에서 진주 주요 3인을 포함한 13인이 차인회 창립을 발기했다. 1979년 1월 20일 ‘한국차인회(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 Korea Traditional Tea Culture Association)’가 서울 무역회관에서 창립행사를 가졌다. 회장에 차나무 연구가인 식물학자 이덕봉 서울대 교수를 선임하고 부회장에 아인 박종한과 명원 김미희 여사, 그리고 고문에 박동선씨를 추대하였다. 설립목적은 ‘국내외 차인들의 모임인 단위 단체를 육성하고 국민 차생활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데 두었다. 한국차인회, 현 ‘한국차인연합회’는 현재 전국에 수백 개 지부를 둔 국내 최대 차회 단체를 이루고 있다. 한국차인회가 결성되자 곧 차문화사업 실현에 나서 먼저 해남차인회와 함께 1980년 봄 초의선사가 주석하던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하여 전국에 차생활 의미를 알렸다.

이듬해인 1981년 한국차인회 주최, 진주차인회 주관으로 5월 25일 진주성 촉석루에서 ‘차의 날’을 제정 기념식을 가졌다. 아인은 지회장 겸 진주차인회 회장을 맡아 제정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전국 회원들이 모여서 민족의 차문화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차문화를 창조하려는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매년 이날을 ‘차의 날’로 선포했다. 입춘에서 100일째 쯤 햇차가 시중에 나오는 이 날을 차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차나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백일이 될 때 새싹을 맺게 되는 축복 받는 날이라 하여, 아기들의 백일잔치와 같은 뜻이 담겨져 있다.

이어서 하동으로 가 지리산 쌍계사 입구에 신라 흥덕왕 시대 차시배를 기념하여 ‘대렴공 추원비’를 건립하고 추모헌차례를 거행했다.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져왔던 대렴공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차 시배지인 하동 쌍계사 계곡에 높이 6척의 추원비를 세웠다(현재는 차시배지로 추정되는 차밭으로 옮겼다). 지리산 화개동의 쌍계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신라 차승 진감국사비가 서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말 칠불암(현 칠불사)에 머물던 초의선사는 화개동 작설차를 노래하기도 했다.

한국차문화 운동의 핵이 되는 진주차례회에서 시작된 차회 단체는 한국차도회를 거쳐 서울에서 전국 규모의 한국차인회로 결집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차인회 활동은 다시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휴식과 각성의 차를 쉽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현대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전국 차인들은 매년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정하여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전국의 크고 작은 여러 차회단체가 이날에 차회를 열어 이를 기념하고 수많은 시민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한다.

 
▲ 효당이 사용하던 차도구(그림 정헌식)

◇차문화 도시 진주와 한국의 미래

진주에서 일어난 차생활 운동은 홍익인간, 차도무문의 인문정신, 차예술, 그리고 지리산 차와 함께하는 멋생활을 권했다. 또 술 위주 문화에서 벗어나 차를 마시며 건강하고 알뜰한 살림살이하는 사회가 되기를 강조했다. 1991년에 창립한 ‘강우차회’는 27년간의 연구 끝에,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차문화운동은 효당 개인, 아인 혼자, 시민의 자발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진 산발적인 일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요목을 갖춘 인문학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사건은 옛날 진주목, 서부경남인 강우(江右, 낙동강 오른쪽)지역에서 일어난 차문화운동이라 하여 ‘진주 차맛’ 혹은 ‘진주차풍(晉州茶風)’ 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에 와서 강우 진주지역 시민들이 일궈낸 또 하나의 자부심이자 정신가치가 되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차문화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차는 소수의 전유물에서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다수의 보통 음료가 되었다. 고대 사국시대(四國時代)부터 시작된 차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됨으로써 한국 차문화사는 제대로 된 이론과 실천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진주 차맛’은 곧 ‘진주차풍’으로 진주에만 머물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진주차풍’은 한국의 차맛이며, 동양의 차맛이고, 세계의 차맛으로 이어진다. ‘진주차풍’은 현재 진행형이며 멈추어서는 안 되는 현대 차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다.

2016년은 현대 한국차문화운동 50년이 되는 해이며, ‘차의 날’ 제정선언 35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5월 21~22일 양일간 진주연합차인회 주최로 진주성 일원에서 ‘진주 차문화 축제’를 열었다.

한편 2014년 12월에는 국회에서 ‘차문화산업진흥법’이 발효돼 국가적 규모의 차문화운동과 차산업 실현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진주가 한국차문화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차회 단체나 공공기관이 시민을 위한 ‘차문화센터’와 ‘차문화공원’을 건립하고 체계적인 ‘차문화 문고’를 펴내며 차생활의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시민들에게 보여 줄만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차문화를 담은 ‘차박물관’도 디자인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경관과 건축물도 대정원을 이루고 있는 지리산―남강―진주―남해라는 거대한 조형에 순응하고 있는지, 과연 산과 숲 그리고 물로 둘러싸인 문화예술의 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즐겨 찾는 아름다운 도시 진주, 숲의 도시, 물의 도시, 빛의 도시, 차의 도시, 첨단과 자연이 어울리는 진주로 만들어 가야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나는 도시여야 할 것이다.

첨단 산업은 자연과 더불어 짝지을 때 비로소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과학정보기술의 발달과 함께 원활한 물류의 흐름을 확보하고 고속인터넷망을 구축하여 국가행정망을 단순화하고 지식정보의 빠른 소통으로 한국 전체를 통털어 하나로 묶은 이른바 ‘대한민국시(大韓民國市)’로 변모해 가야 할 것이다.

 
필자_정헌식

1981년 5월 25일 진주 촉석루에서 열린 차의 날 선포 기념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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