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6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68)
  • 경남일보
  • 승인 2017.12.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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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7 (568)

얼굴색이 새치름하게 굳어진 명자를 건너다보면서 호남은 실실 웃기까지 한다. 여차하면 늙은 재일교포 현지처는 뭐 대단한 귀족인줄 아느냐고 농담처럼 면박을 줄지도 모른다. 양지는 얼른 수습에 나섰다.

“언니 우리들 말에 너무 신경 쓰지마요. 언니는 언니 소원대로 하고 싶은 일 했으면 됐고 우리는 또 굳이 이런 것 없어도 잘 사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만 이해하면 돼요. 날마다 족보 펴놓고 사는 세상도 아닌데 괜히 언니 심기만 산란하게 했네요. 우리 갈께요.”

양지는 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쓰며 명자를 달랬다. 결기 찬 호남이 옆에 있어서 든든했고 숫자로 따져도 위축될 리 없는 우위에 있어 전에 없이 여유롭고 느긋해졌다. 양지는 귀남과 호남을 이끌고 분기를 삭이지 못해 쫑알거리고 있는 명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유유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아웅다웅하면서도 뭉쳐서 적을 퇴치한 것처럼 뒷맛이 으쓱한 표정으로 두 언니를 둘러보던 호남이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면서 물었다.

“우리 온 김에 엄마 산소에나 갔다 갈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양지는 얼른 동의를 못했다.

“너, 시간 되겠어?”

“어차피 시간 만들어 준 사람 여기 안 있나.”

어정어정 뒤따라오는 귀남을 겨냥해서 호남이 삐죽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양지가 귀남을 돌아보자 내 모른 듯 딴전으로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던 귀남이 다른 제의를 했다.

“난 안 간다. 차라리 우리 동네로 가자.”

“우리 동네가 어딨어. 앞들은 물에 다 잠기고 동네는 아스팔트길에 덮이고 없는데.”

뜬금없는 귀남의 제안에 호남이 타박을 했다. 귀남이 파토내서 어긋난 일정에 대한 앙갚음에서 나온 짙은 반응이다. 핼끔 특유의 안색으로 호남을 흘겨보며 귀남도 지지 않고 토를 달았다.

“가시나 지랄한다. 없기는 와 없어. 그 언덕, 그 방구, 그 나무들, 풀, 흙, 바람, 물, 햇살,”

꿈속을 헤매듯 간잔조롬해진 눈길이 된 귀남이 천천히 하나 씩 물체들을 입에 올리자 어느덧 옛날, 그 때 그 마을이 되살아났다. 호남은 또 날을 세웠다.

“엇쭈구리, 시인 났네. 시인 났어!”

“그래 나 글 짓는다. 아버지 엄니 욕고 썼고 요새는 니 욕도 막 낙서를 한다. 니 잘못하는 거 낱낱이 적어서 네 고객들한테 일러바칠라꼬.”

듣고 있던 양지가 눈을 찡긋하며 사내처럼 투박하고 날선 호남의 반응으로 더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을 차단했다. 운전대가 호남의 손에 잡혀있으니 더욱 그런 점에 양지는 신경이 씌었다.

“그래 좋다. 우리 시인이 또 어떤 전위극까지 연출해서 간뗌 시킬지 우리 고향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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