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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 <22>도시역사와 역사적 문화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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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4  2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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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기원

진주에는 문자 기록이 전하지 않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었다. 진주 평거동의 ‘진주 평거유적공원(약9만 7000㎡)’은 진주 평거3택지 개발사업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신석기시대 후기의 의례유구인 원형석축유구를 포함, 청동기시대 전기 취락유적, 삼국시대 취락 관련 유구 등이 발굴, 전시돼 있다. 그동안 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던 소중한 공간들이 발굴, 보전돼 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소중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렇게 가치 있고 중요한 공간이 있음에도 행정이나 지역민들의 관심과 활용의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중한 역사적 공간을 마련했지만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보완하는 노력이 있을 때 부가가치가 만들어 지고, 지역의 역사와 전통은 지속될 수 있다.

   
평거유적공원


진주에는 대평리 고인돌 유적와 같은 지역의 역사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증명하는 유적과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대부분 단순히 바위나 돌무더기로 가볍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고인돌은 역사서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고, 기원전 역사를 전하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진주 원도심 지역에도 많은 고인돌 유구들이 존재했겠지만 개발로 인해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진주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고인돌이나 선사시대 유구를 발굴·보전하고, 그 가치를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도시는 과거의 도시바탕 위에서 만들어졌고, 그리고 미래의 도시는 현재의 도시바탕위에서 창조해가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연구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보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역사문화도시 진주로의 재생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기록을 통해 보는 진주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편찬)에 따르면 ‘강주(康州)는 신문왕 5년(685년), 당나라 수공 원년에 거타주를 분할하여 청주(菁州)를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강주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진주(晉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찬지리지인 16세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 건치연혁조를 통해 고대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는 진주의 변천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이전의 진주

일단 진주는 기록상으로는 백제의 거열성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그 이전 가야의 거점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후 백제를 거쳐 신라에 복속되면서 9주 5소경의 하나인 강주(康州)가 설치되었다. 신라 때 주(州)의 치소(治所)가 설치되었던 만큼 진주는 행정·군사적 거점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일정한 규모의 도시가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의 도시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 강주(康州)의 치소와 고려 진주목(晉州牧)의 치소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진주성이 그 거점이었는지, 아니면 후술하는 조선시대의 위치이었는지도 불분명하므로 당시의 도시 상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조선시대의 진주

조선시대 이후의 진주에 관해서는 역사적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진주의 도시구조는 비봉산(飛鳳山)을 배경으로 객관과 관아 등 행정시설과 주거공간이 구축되어 있었으며, 진주성은 병영이 설치되는 등 군사적 기능과 함께 거주의 기능도 겸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진주에는 가구 수가 1만3960호, 인구는 6만5098명(남 2만8548명, 여 3만6550명) 규모의 도시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진주성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 조에는 하륜(河崙. 1347~1416)이 쓴 성문기(城門記)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진주성의 이름은 촉석성(矗石城)이었고, 그 규모는 둘레가 4359척, 높이는 15척이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1379년 지밀사 배극렴이 목관 김중광에게 공문을 보내 토성이었던 성을 석성으로 수축하도록 하였다. 진주성은 지형에 따른 분류에서 보면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平山城)이라 할 수 있고, 재료적으로는 석축성이다.

   
▲ 석축성


임진왜란(1592~)때 제1차 진주성전투(1592.10)과 제2차 진주성 전투(1593.11) 를 통해 도시의 민가나 건축물들은 대부분 훼손되었을 것이다. 진양지(晉陽誌, 1622∼1632)에서는 관찰사 김수(金?)가 1591년에 동쪽으로 가축하여 성을 크게 쌓았고, 1593년 성이 함락된 후,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성이 너무 넓어 방어하기가 힘들다고 여겨 성의 내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내성(內城)을 축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 경상도, 우도병마절도영(右道兵馬節度營), 성지(城池)조에 의하면 진주성의 둘레는 내성이 1930척, 외성 1만330척, 높이는 25척이다. 우병영지도를 통해 진주성의 형태와 크기, 공간을 이해 할 수 있다.

이후 16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에 의해 성이 수축되는 등 진주성은 수차례의 변화가 있었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성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척도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의 성곽구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여지도서, 경상도에 실려있는 우병영지도
   
 진주성도에서 보는 객사 및 관아배치도
   
진주객사



관아는 지금으로 보면 진주시청에 해당한다. 하륜(1347∼1416)의 기문에서 ‘객관(客館)은 안노생(安魯生, 1404년. 부사로 부임)이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최이(1356~1426)와 은여림(殷汝霖)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객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위계가 가장 높은 건물이다. 그리고 동 기문을 통해 객관(客館)의 남쪽으로 봉명루(鳳鳴樓)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조양관(朝陽館)은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1484~1548)이 건축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조선 초기 행정의 중심이 진주성이 아닌 비봉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 1묘 3단의 제사 공간

조선시대의 읍치(邑治)에는 1묘 3단의 제사시설- 문묘와 사직단, 그리고 성황단과 여단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사직단은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토지 신과 곡식 신을 모시고, 민간 신앙적 성격이 강한 성황단과 여단도 국가적인 공식행사로 수용함으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구조를 구현하고자했던 당시의 유교적 이념이 공간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진주에는 현재 문묘가 향교에 모셔져 있고, 사직단은 훼손되어 방치되어 있지만 최근 문화재 지정을 위해 뜻있는 지역민들의 노력이 있지만 진행과정이 순조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보다 많은 지역민들의 관심과 행정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진주향교
   
진주사직단 유구


◇진주의 근대적 도시계획

진주의 근대적 도시계획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데, 동아일보 1927년 3월 17일자에 진주에서 ‘시구개정 기공식을 거행’한 기사를 확인 할 수 있다.
 

   
동아일보기사. 진주 시구개정 기공식거행.


시구개정을 통한 근대적 도시계획과 함께 1920년대 배다리의 건립과 유실, 그리고 1927년 철교의 건립, 1938년의 대사지 매립은 진주의 도시공간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시구개정 다음으로 진주의 도시공간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1934년 6월 20일에 총독부령 제 18호로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의 시행이다. 이 법령은 일제가 시구개정만으로는 조선의 도시 관리가 어렵고 식민지 통치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별도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일본의 도시계획법(1919년)과 시가지건축물법(1919)을 하나로 묶어 놓은 내용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지역지구의 지정, 건축물 제한, 그리고 구획정리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6년 발행된 지형도를 보면 전체적으로 1910년대에 비하여 남강 남쪽의 오늘날 강남동과 천전동 지역으로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1960년대 이후 진주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진양군과 진주시가 통합되면서 새로운 진주시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도시개발은 1966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위한 단독법으로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을 제정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변화하게 된다. 진주 또한 대안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52. 8.20~1972. 3.16)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는 장대동(1970.11.27~1971.5.27), 상평동(1968.8.14~1971.1.23)에도 일부 구획정리가 시행되었다.

특히 진양교가 준공(1969. 10. 3)되면서 칠암동(원래 진양군(晉陽郡) 섭천면(涉川面) 천전동(川前洞)지역)과 도동간의 왕래가 뱃길에서 육로로 바뀌게 되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봉곡동, 상봉서동 등 서부지구(1971.~1972.12.14), 칠암지구(1974.6.11~1975.12.24), 상대동과 하대동 등 상평2차지구(1974.7.20~1977.7.8), 남강지구(1979.7.10~1982.9.11)등이 계속적으로 개발되었다.

◇1980년대 이후 진주

1981년 도시계획법 개정에 의해 도시기본계획이 법정화 됐고, 진주시의 1984년 도시기본계획에서는 호탄지역을 개발하고, 특히 1987년부터 1991년까지를 계획기간으로 했던 진주시 도시개발계획 2단계에 평거동이 포함되었다. 평거지역에도 주택지조성사업과 택지개발사업이 시행되어 신시가지형태의 신개발이 추진되었다.

◇2000년대 혁신도시 건설과 도시재생사업

2000년대가 되면서 진주는 금산, 초전, 초장 지역이 새롭게 주거지로 추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특히 혁신도시의 건설, 신진주역세권 개발, 평거 3·4지구로 이어지는 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남동발전(2014년 3월)과 한국토지주택공사(2015년 4월) 이전을 필두로 한 진주혁신도시의 건설은 진주의 도시공간구조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국토균형발전 일환으로 추진돼 조성된 경남진주혁신도시 모습. 진주시 문산읍, 금산면, 호탄동 일원에 조성됐다. 11개 이전 공공기관이 입주해 있으며 인구 3만8000명 신도시로 계획됐다.


신도시 개발은 반대로 원도심의 쇠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문제는 진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원도심의 쇠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4년부터 전국적으로 도시재생사업(2013년 제정된 도시재생특별조치법에 근거)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정부에서도 2017년 9월 25일 ‘도시재생뉴딜사업 대상지 선정’을 통해 원도심 기능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진주시도 신도시개발과 함께 중앙시장, 지하상가 리모델링, 옥봉 새뜰마을 사업 등의 원도심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원도심 재생을 위한 보다 입체적인 구상과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참고문헌
1. 김준형, 조선시대 진주성의 규모와 모양의 변화, 역사와 경계 86(2013.3), 69~95쪽. 2. 삼국사기. 3. 신증동국여지승람. 4. 진양지. 5. 여지도서. 6. 진주시, 진주도시계획사

 

   
신상화
한국국제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한국주거환경학회 부회장
한국부동산법학회 부회장
창원시 경관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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