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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익어가는 것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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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6  18: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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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숙영

꽃등 주렁주렁 늘여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던 등나무가 있는 공원이다. 초겨울이 되니 낙엽만 수북이 깔렸고 사람 흔적이 없다. 쌀쌀한 날씨 탓도 있지만 어둠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공원의 낙엽을 발로 차보기도 하고 흩날려도 본다. 사위는 고요하고 가끔씩 스르륵 낙엽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이다. 그때 갑자기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뚝…뚝…’ 먼 곳에서 사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설한풍에 못 이겨 나무둥치가 부러지는 듯도 하다. 놀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참 신경을 모은 끝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바로 옆 등나무에서 기다란 열매 꼬투리를 여는 소리였다. 등나무 아래 시멘트바닥에는 까만 바둑돌 같은 몽근 알맹이가 좌르르 흩어져 있다.

비틀린 덩굴손으로 정자의 기둥을 붙들고 올라가 한여름 뙤약볕을 피하도록 만들고 삶이 고단한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준 나무였다. 할 일 다 마친 듯 나무는 인기척 없는 밤을 도와 한해를 살아낸 흔적을 남기려 하고 있다.

씨앗을 퍼뜨리는 중대한 일이건만 바닥은 시멘트라 뿌리내리기가 힘들다. 나는 공원 한 쪽의 흙바닥을 발뒤꿈치로 툭툭 파서 떨어진 씨앗을 한 줌 주워 묻어 주었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낮에도 기척을 했지만 시끌벅적한 무관심 속에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늘만 해도 그 아래서는 딱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격론을 벌여 왁자하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씨앗이 그렇듯 익어가는 것은 둥글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땅이든 마다않고 굴러가 묻혀 씨를 퍼뜨릴 수 있다. 그곳이 흙 한 톨 구경하기 힘든 바위틈이든 눅눅한 하수구이든 상관없다. 한 줌 햇살과 바람결에 실려 온 먼지 한 톨에 기대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만들려 가장 낮은 곳을 향한다. 굴러가 앉는 자리가 명당이려니 한다. 자리를 탓하기보다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여름 비바람을 견디고 열매가 그렇듯 굴곡진 삶을 살아낸 사람의 마음 또한 씻기고 깎여 둥글어지는 것은 완성의 단계로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침잠하는 이 계절에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좋은 때이다.

이 밤, 등나무가 쏟아놓은 씨앗을 보며 생각이 깊어진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꽃도 피울 수 없다. 각진 기둥이나마 붙잡으려면 별수 없이 자신을 구부려 안으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뾰족뾰족 각을 세우며 튀려는 마음을 다스려 둥글둥글 익어가고 싶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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