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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후 명함에는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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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3  17: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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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숙영

십여 년 전 아동센터에서 근무할 때였다. 초등학생들에게 3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명함을 만들게 했다. 미래의 꿈이 정해져 있으면 도전하려는 마음이 더해져 다가서기 또한 쉬울 거라 생각했다. 장년이 되어 지도자의 위치에 가 있을 때를 상상하며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직함이나 직장명, 로고 등도 함께 넣어 근사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색연필, 싸인펜 등을 사용하여 알록달록 모두들 열심히 그리고 꾸몄다.

한데 일분도 채 되지 않아 한 아이가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버렸다. 아프냐고 물었더니 벌써 다했다며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아이의 팔꿈치 밑에 깔려 꾸깃한 명함을 꺼내보니 ‘노숙자’ 라는 단어만 낙서처럼 흘려 써 놓았다. 좀 더 생각해보고 정성을 기울이라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수업을 마치고 조용히 불렀다. 신학기라 다른 아이들은 신이 난 얼굴인데 갓 오학년이 된 그는 얼굴가득 짜증을 담고 있었다. 노숙자가 뭔지를 알기나 하는지, 노숙자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아빠가 노숙자 되라고 했어요. 힘들여 돈 벌면 기초생활 수급자에서 벗어나 여기도 못 다닌대요.”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센터에서 밥도 잘 해주었으며 참고서며 학용품도 거저 지급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씩은 영화관이나 과학관에도 데리고 다녔다. 갖가지 문화혜택을 손쉽게 누리는데 돈을 벌면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꿈은 가져야지.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래? 너는 먹는 것을 좋아하니 식당 사장님이 되어 먹고 싶은 것 네 마음껏 해 먹는 거야. 어때? 이제부터 너를 사장님이라 부를게”

그날부터 이 년여를 나는 그 아이의 이름대신 ○사장님으로 불러주었다. 책상 밑에서 뒹굴거나 싸움을 걸기 일쑤였던 그가 얼마가 지난 후에는 사장이 된 것처럼 센터 동생들을 지휘하며 이끌었다.

며칠 전 길에서 만난 한 지인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월급이 오르면 아들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아들하나를 키우는 그녀가 행여 임금인상으로 한 부모 가족 지원액을 넘겨 복지혜택을 못 받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허리 휘도록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명함에다 당당하게 ‘노숙자’라고 써 놓았던 그 일이 생각나니 웬일일까. 아이들의 30년 후 명함에서 뿌듯한 희망을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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