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를 추억하다
허숙영(수필가)
구멍가게를 추억하다
허숙영(수필가)
  • 경남일보
  • 승인 2018.02.2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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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숙영
새해 달력을 넘겨본다. 세상의 속도전에서 비켜 선 그림이 눈길을 붙잡는다. 소복하게 쌓인 눈 속에, 혹은 시릴 듯 푸른 녹음 속에 시골 구멍가게들이 파묻혀있다. 섬말상회, 욱기상회 등 마을이름을 딴 것도 있고 복희슈퍼처럼 아이의 이름을 붙인 것도 있다. 간판이라도 달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허름한 이름표조차 얻지 못하고 뭉뚱그려 구멍가게라고 불리다 스러져 가는 곳도 많을 것이다. 아줌마 아저씨로 불리다 가는 촌로들처럼.

동심으로 안내하는 그림을 따라가면 더듬이 같은 낡은 전선줄을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무심히 서 있는 어린 날의 구멍가게를 만나게 된다. 마을의 안테나 역할로 훈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불러 모으기도 하고 유일하게 바깥소식을 전해주기 했지. 시골버스 정류장을 겸하기도 해서 차표를 사 떠나고 내리는 사람들이 안부를 물으며 소통의 통로 역할도 했다. 앞마당에는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쯤 파수꾼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나무아래는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내놓아 여름에는 그늘에 쉬다 가게하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탁배기 한 잔으로 오고가는 어른들이 목을 축이며 시름을 털어놓는 쉼터였다.

자그마한 장난감 같은 빨간 우체통은 구멍가게의 단짝이었지. 총총히 우표를 사고 침을 발라 집 떠난 언니나 펜팔 친구에게 편지를 써넣으며 얼마나 설레며 답을 기다렸던가. 우체통속에서 ‘툭’ 편지 떨어지는 소리에 이미 그리운 이들에게 가 닿은 듯 가슴 두근거리기도 했지. 우체통과 함께 빛바래고 낡은 손바닥만 한 담배 표지판도 한구석 차지해 붙어있어야 제격이었다. 덜컹거리는 유리 격자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게는 아이들에게 보물 창고였다. 동전 몇 개만 들고서도 갈 수 있는 곳. 쫀드기를 입에 물고 수정구슬 몇 개쯤 손에 쥐는 날이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지만 정겨운 풍경이었다.

이제 서민의 애환이 스민 구멍가게는 찾기 힘들다. 대신 구석구석 감시의 눈을 달고 있는 도시의 대형마켓이 점령하고 있다. 가격표를 붙여놓으니 흥정도 없고 기계가 척척 계산해주니 대화도 필요 없다. 학용품은 학교에서 단체로 사서 나누어주고 휴대전화는 수시로 소식을 날리니 우표를 살 일도 없다.

사람이 기계화 되고 사회는 사람이 필요치 않다. 학교 앞에 문방구가 사라져가는 곳이 많다. 이제 달력 속에서 우련한 그림을 보며 아쉬운 심사를 달랜다. 구멍가게는 내 마음에 들어앉힌 한 편의 서정시다. 음미하고 싶을 때는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곳이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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