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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8 (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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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1  00: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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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남자는 나무 둥치이며 여자는 잎이나 꽃이라고 현태어머니는 비유했다. 꽃은 열매를 남기는데 그 열매가 싹 나는 토양에 따라서 뭍에 오른 유자처럼 탱자가 될 수도 있다. 기운 빠진 늙은이의 밥을 먹고 유자는 서서히 탱자의 길로 접어드는 느낌이 그 아이 완의 그림자였다.

양지가 돌아갈 준비를 하자 현태어머니가 손을 잡고 막았다.

“옴마 집에 온데키 하룻밤 자고 가라. 영감도 먼저 가고 없으니 나도 적적하다. 에린 기 앞에서 꼬물거리다 저것마저 잠들고 나모 잠이 안 와서 뜬 눈으로 새울 때도 많으니, 밤이 오는 기 무섭다.”

적적한 밤이 무섭다는 말에 낚인 양지는 하룻밤 자고 가라는 현태어머니의 권고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그니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양지는 뜰 안을 서성거리며 저녁 이내로 쳐져내리는 낯선 곳이지만 낯설지 않은 기시감에 젖었다. 그가 자란 곳이다. 그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땅이다. 그의 시선으로 성장했을 자연은 그대로 있는데 그는 없다. 아니, 그는 지금 중국 어디선가 직장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전화도 편지도 단절된 채로 지낼 뿐.

살그머니 누군가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니 현태의 아들 완이 다가와서 양지를 올려다본다. 그녀가 시선을 맞추니 아이가 말을 걸었다.

“우리 아빠 친구라고 했죠?”

요즘 아이들은 다 이런가 싶게 되바라진 똑똑함이 훅 끼쳐왔다. 텔레비전 영향을 받아선지 구사하는 억양도 표준말도 텔레비전 속 어린 배우가 같이 있는 것 같다. 양지는 어릴 때 자신이 처음 서울 입성했을 때의 초라한 언어가 떠올라 문명의 격세지감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문득 난해해진 양지는 말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상대방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저 먼저 주저하는 인상을 지은 아이는 상체를 꼬거나 제 머리통을 뒤적뒤적 긁으면서 양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해봐.”

“햇님반 아이들한테 완이 엄마라고 해 주면 안돼요?”

순간 양지는 심호흡을 멈추었다. 할머니는 못해주는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는 정도의 부탁이려니 가볍게 짐작한 뜻이 가격을 당한 듯한 충격이었다. 얼마 전 수연의 친구들에게 환심 작업을 했던 일이 후딱 떠올랐다. 엄마라고 해달라니. 이런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의 발상을 어떻게 거절할지 양지는 난감해졌다. 그러나 낙심할 아이의 표정을 보게 될까 시린 마음이 앞서 에둘렀다.

“애들이 많이 놀리니?”

아이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상체를 그저 흔들면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 묵묵한 침묵이 양지의 마음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어린 마음에 새겨진 한 서린 아픔이 구원 요청을 하는 것이다. 울컥 측은지심이 든 양지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땀 냄새, 구정물 냄새가 아이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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