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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박은정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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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2  0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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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등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있은지 꼭 50년 되는 올해, 북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울에 나타났다. 50년 전 1월 21일 야음을 틈타 무장공비 31명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숨어들었지만 2018년 1월엔 공식 절차를 밟은 북한의 파견단이 서울로 입성했다.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장이 북측 예술단의 남측 파견을 위한 사전 점검차 1박2일 일정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평창올림픽을 불과 20여 일 남겨두고 북한이 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혀 해당 종목의 선수들이나 또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하다. 그동안 끊겼던 북한과의 사이가 다시 해빙무드를 타게 되는 건 반길만한 일이지만 4년 동안 올림픽 하나 만을 바라보고 묵묵히 훈련에 해왔을 선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분단세대들의 아픔을 직접 이해할 수 없는 2030 세대들에게는 한민족이란 느낌도 사실은 다소 퇴색되어버려 그저 북한여인의 옷차림에만 눈길이 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박은정 편집디자이너
   
 

1968년 1월23일자 1면 - 서울 근교서 무장간첩과 교전
1·21 무장공비 청와대기습 미수사건(김신조 사건)

1968년 1월 23일자 1면에는 ‘1·21 사건’에 대한 기사들로 채워져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서울의 세금정 고개를 넘어 청와대를 향해가고 있었다. 나흘 전인 1월 17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온 그들의 목적은 청와대를 기습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 와중에 종로경찰서장과 민간이 5명이 피살되기도 했다.

군경의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31명 가운데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했으며 나머지 1명은 도주해 북으로 넘어갔다.

1·21사건으로 이름붙은 청와대 미수 사건은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사건이어서 남북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시도였으니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됐고, 유사시 학생들도 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군사교육이 교련이 실시된 계기이기도 했다.

아울러 북한에 보복하기 위해 684부대라는 비밀부대를 창설해 인천 앞바다의 실미도에서 대북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684부대는 美·蘇간 냉전완화 분위기 속에 해체된 이 부대의 이야기는 영화 ‘실미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또 간첩이나 공작원 등을 식별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12자리의 번호를 부여하면서 주민등록번호가 만들어졌고, 1975년부터는 현재와 같은 체계로 발전하게 됐다. 이로써 주민등록번호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표식이 됐다.

1968년 한 해에 걸쳐 벌어진 북한의 도발행위는 우리정부와 국민에 반공의식의 전화점을 가져왔다. 일명 김신조 사건으로 인해 반공을 국시로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소위 빨갱이에 관한 증오와 공포가 일반적 인식으로 자리잡게 됐고, 집권자는 권력강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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