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아래서
허숙영(수필가)
보름달 아래서
허숙영(수필가)
  • 경남일보
  • 승인 2018.03.0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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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숙영

보름달이 훤하다. 세상 구석구석에 빛이 들기를 염원하지만 높은 빌딩 숲에 가려서인지 그늘진 곳이 많아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여느 해처럼 우리부부는 아침부터 소주잔을 채워 귀밝이술을 하고 호두를 깨물었다. 귀가 너무 밝아도 탈이라고 하자 좋은 말만 듣는 귀는 밝아도 괜찮다며 남편이 응수하고 서로에게 더위를 팔며 올해도 탈 없이 넘어가기를 빌었다. 둥근 달 만큼이나 마음 넉넉한 정월 대보름의 이런 풍경이 좋다.

보름 밥을 싸서 먹으면 꿩알을 줍는다는 행운의 아주까리 잎은 없지만 김과 묵은 나물로 대신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갈무리 해 둔 보드라운 잎을 들기름에 볶아 쌈을 싸먹었다.

불현 듯 그 옛날 어머니의 보름나기가 생각난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이면 우리 집에는 대나무조리를 든 이웃 아이들이 몰려들곤 했다. 어머니는 복조리마다 꾹꾹 눌러 밥을 담아주며 한 해의 복을 빌어 주었다.

이날은 타성(他姓) 석 집의 밥을 얻어먹으면 복을 받는다는 날이다. 아마도 씨족 마을이 대부분이었을 당시에, 성이 다른 이들과의 정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누군가에 의해 전해진 말이 아닐까 싶다. 근근이 이어가는 살림에도 보름날 오곡밥을 한 솥 그득히 지어 이웃을 위해 푹푹 퍼내었다. 마치 복을 전해 나르는 전령사나 된 듯이…,

어린마음에 이날만큼은 우리 집에도 사람이 북적대어 마냥 좋아했다. 마을 앞 빈 논바닥에는 하늘과 땅의 매개체인 달집이 세워지고 풍물패들이 떠들썩하게 축제를 알렸다. 흥겨운 놀이마당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모여 소망을 빌며 즐겼다. 청솔가지와 대나무가 타닥타닥 튀면서 마지막 올린 소지불이 잦아들면 동네 아낙네들은 잔불 속에 콩이 든 손다리미를 디밀었다. 볶은 콩을 한 줌씩 나누어주며 바싹 깨서 먹으라고 했는데 그것이 부럼이었다. 어른들은 가지고 온 음식으로 술판을 벌리고 신나는 풍물패의 장단을 안주삼아 잔을 들었다.

농한기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보름행사에는 겨우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허약해진 체력 보강을 위해 오곡밥과 묵은 나물, 견과류 등을 골고루 먹게 한 깊은 뜻이 있다. 처지려는 마음에서 깨어나 한해의 농사에 임하라는 뜻도 들어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달집은 온 이웃이 함께 정 나누려 만든 기도처가 아니었을까. 하루라도 유쾌하게 웃으며 지내보려는 민초들의 날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정월 대보름 문화에 푹 빠져 본 하루였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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