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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복의 세계 오지여행 [1]부탄(상)'비정상회담' 출신 린첸 안내로 파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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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2  00: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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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담회중 만난 파로시 고위공무원.


2017년은 한국과 부탄 수교 3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한국 관광객들에게만 특별 프로모션을 준비하여 홍보 차 내한한 부탄 관광청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고, 정식으로 초청을 받아 갑작스럽게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방콕을 거쳐 부탄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고 짐을 꾸렸다.

늘 그러하듯이 내 짐은 내 여행의 떨림만큼 가벼웠다. 삶의 무게를 벗으려 떠나는 여행길에 짐의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건 웬 말인가. 방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가올 무렵이라 시내 나가기를 포기하고 공항 내에서 이른 아침 타는 부탄 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번 여행에는 과분하게도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이 주어졌다. 월 2불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수없이 본 나로서 늘 싼 표만 찾아 여행을 하다 초청받아 가는 길이라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린다.

네팔의 카트만두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부탄 유일의 국제공항이 있는 파로로 향한다. 히말라야 명봉들이 구름위로 솟아오른 모습은 마치 공룡등 일부가 드러난 듯 그 기세가 힘차다. 곧 비행기는 하강하기 시작했고 밑을 내려다 봤을 때 그저 깊고 깊은 산들만 보였다. 어디로 내린다는 말인가. 협곡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던 찰나 비행기의 활강이 시작되었다. 왜 부탄 여행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첫째로 이 경험을 말해줄 것이다. 전 세계에서 파로국제공항에 착륙할 수 있는 파일럿이 8명뿐이라는 이유를 알겠다.

   
▲ 공항청사
 

부탄의 첫 느낌은 청명함 그 자체였다. 내가 갔을 때가 4월이었는데 우리의 가을 하늘보다 더 높고 맑은 날씨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걸어서 공항 청사로 이동하는 중에 모든 사람들은 서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고 찍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맡긴 짐보다도 한 참 뒤에야 나오게 됐다.

전통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들도 이색적이었고 공항직원들 모두 전통 의상을 입고 일하는 모습도 신기했다. 청사를 나서니 자칭 ‘이민호’라는 통역이 고(Gho)를 입고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목에 환영을 의미하는 스카프를 걸어주었다. 곧장 파로의 다운타운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가볍게 시내 구경을 하였다. 시내라고 하기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상점 외에는 크게 눈길 가는 곳이 없었고 관광 성수기가 아니라 길을 걷는 사람들의 수도 많지 않았다. 부탄에서는 신호등을 볼 수 없다. 여행 내 내 우리 차를 막아 세우는 것은 개와 소 그리고 야크무리였다. 특히 낮에 다니면 곳곳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개들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밤에는 짖어대며 무리지어 다녔다.

   
▲ 부탄 사람들은 그 직위에 맞는 색깔의 천으로 몸을 감싼다. 천의 색깔만 봐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파로 종(Dzong)이다. 종은 행정관청과 사원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부탄 사람들은 그 직위에 맞는 색깔의 천으로 몸을 감싼다. 천의 색깔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종 내부를 둘러보는 와중에 회의중간 잠시 차담회를 가지고 있는 고위 공무원들을 만나게 되어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했다. 국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는 이곳은 모든 곳에서 종교가 스며들어 있고 정치적 지도자들과 종교적 지도자가 거의 동급의 힘을 가진 듯 했다. 우리가 부탄이라는 나라 앞에 꼭 붙이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이들이 가진 종교에서 오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 부탄 여행의 백미, 탁상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 사원 내부는 여러 개의 사당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가파른 절벽에 세워진 곳이라 내부는 비좁고 계단이 많았다. 


둘째 날은 부탄 여행의 백미, 탁상 사원으로 향한다. 입구에선 등산 스틱이라며 나무 막대를 1불에 빌려주고 있었고 양쪽으로 기념품 파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20불을 내면 중턱까지 말을 타고 갈 수도 있었다. 매일 2시간 산을 타며 운동하는 내가 같이 출발한 사람들보다 자꾸 뒤쳐진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하고 어디서 왔냐고 묻고 몇 살이냐 묻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탁상사원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다다르니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입구에서 나무를 해오는 직원을 만나 나이를 물으니 스무 몇 살이라고 해 깜짝 놀랐다. 외모로는 마흔은 훌쩍 넘었을 것 같은데 통역했던 가이드가 이곳에서 나고 자라 본인 나이를 잘 모를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렵게 도착한 사원 입구에서 경비원이 내부는 촬영금지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부탄의 모든 사원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눈에만 담아가기엔 너무나 아쉬운데 어쩔 수 없었다. 사원 내부는 여러 개의 사당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가파른 절벽에 세워진 곳이라 내부는 비좁고 계단이 많았다. 사당 내에 있는 불상들은 불심이 강한 사람들이 짊어지고 한 번도 땅에 내리지 않고 여기까지 모셔왔다고 하니 말로만 들어도 그 마음이 대단하다.

내려오는 길에 동행한 여자 가이드에게 나이를 물었다. 서른이라고 한다. 조혼이 일반적인 부탄에서 서른이면 노처녀이다.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일부다처제가 가능하고 흔하지는 않지만 다부일처제도 된다고 하니 문화적 충격이었다. 결혼보다는 본인이 하는 일에 있어 성공을 꿈꾼다고 하는 말에 부탄의 젊은 층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직은 여행 이틀째지만 이곳은 변화와 발전을 경계하며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함께 나누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만 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 시대에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을 가진 나에게 하산 길에 나눈 대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 탁상 사원이 보이는 중턱에 위치한 휴게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셋째날 아침은 짙은 안개로 시작한다. 파로는 해발 2000m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고 어제 다녀온 탁상사원은 3000m가 넘는 곳이라 일행 중 한명이 고산병 증세로 힘들어 한다. 수도 팀푸를 거쳐 푸나카를 간다. 팀푸에서 작은 차로 옮겨 타고 지난 이틀간 함께 했던 통역, 가이드, 운전기사 모두 바뀌어 나머지 여정을 함께 한다고 한다. 새로이 통역을 맡은 린첸은 우리나라에서 경희대를 졸업하고 JTBC방송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 부탄대표로 나온 유명인이었다. 그의 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로 남은 여행이 알차게 진행됐다. 푸나카를 가는 길에 거쳐 가는 도출라는 히말라야 명봉들을 볼 수 있는 곳이라 기대가 컸지만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맑은 날씨를 기대하며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탄의 ‘삼신할배’로 추앙받는 괴짜 스님 드룩파 쿤리의 전설이 내려오는 치미라캉(Chime Lakkhang)에 들러 부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푸나카종(Punakha Dzong)에 도착했다. 모츄(어머니의 강)와 포츄(아버지의 강)이 만나는 곳에 지어진 푸나카 종을 보자 탄성이 나왔다.

 

   
▲ 치미라캉
   
▲ 푸나카종


사원 내부는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구조로 중앙에는 드넓은 광장이 있고 그 곳에는 몇 백년 동안이나 이곳을 지켜냈을 큰 보리수나무가 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음 날 푸나카 종이 잘 보이는 곳에서 카메라를 찍고 있는데 일요일을 맞아 딸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온 아버지들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군인이었고 그 중 한 명은 짧은 시간이지만 인천공항에서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젓가락을 건네며 자리를 만들어 주어 염치불구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도시락을 함께 나누었다. 삶과 여행은 참으로 닮아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이 생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 저녁에 호텔로 돌아가면 이 두 아버지들이 부탄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를 가지고 찾아온다고 한다. 그 마음이 고맙고 따뜻하다.

 

   
 


▲도용복 회장 인터뷰

“25년동안 세계 170여개국을 다녔습니다. 위험한 곳과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 많았기에 여행 전에는 유서를 써놓고 갔습니다”

세계 오지탐험가로 국내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도용복(75)씨는 60대를 갓 넘긴 것처럼 젊어보였다. 그래서 ‘청년 도용복’이 어울렸다. 청년으로 살면서 항상 도전하는 자세를 가진 도용복씨가 본보에 월 1회씩 ‘세계 오지탐험기’를 연재키로 했다.

그에게서 ‘여행과 삶’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실제 그는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고 했다. “에콰도르에서 한 사람이 다가와 목에 칼을 대고 위협했는데 반응을 하면 죽을 것같아 카메라를 주고서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여행의 매력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오지탐험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끝없이 사람냄새를 맡으면서 그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했다. 단순히 문화유적지를 휘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그 땅과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희노애락을 보고 들으며 자신을 반추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한국전쟁 참전국과 참전군인에 관한 얘기를 했다. “참전한 콜롬비아 장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대우를 받지못하고 외딴 오지에 방치돼 있는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며 “어떻게든 그 소식을 널리 알려서 세상의 양지로 나오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16개 참전국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터키 미국 콜롬비아 뉴질랜드 호주 태국…,”

어렵게 살았고 죽을 각오로 참전을 선택했다. “가난 때문에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귀국 후 이를 종잣돈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사업을 해 쏠쏠한 재미를 봤다”며 “지금은 ‘사라토가’라는 골프용품을 생산하는 어엿한 중견기업인이 됐다”말했다.

한창 사업을 하던 중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5년전 전쟁후유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언제 삶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25년간 170여개국을 여행했다”고 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여행 한다. 화려하지 않다. 그는 “170여개국을 다녔다고 하니 돈이 많아서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배낭 하나에 옷 두세벌, 카메라가 전부”라고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숙소 역시 작은 쪽방에서부터 민가 등 주어지는 여건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유언장을 써놓고 있다. “‘네 형제가 서로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 는 내용인데 가족에 대한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벼랑 끝 참전과 그 고통까지 안고 있는 도용복 여행가의 희망은 “힘 닿는 데까지 세계 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중에 경남일보와의 약속도 들어 있다. 그는 “오지여행은 또 다른 삶의 시작임과 동시에 인생역정을 완성해 가는 일”이라며 “낯선나라, 낯선도시, 낯선시골로 세계인을 만나기위해 다시 떠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15.호텔에서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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