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사상(敬義思想),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 단성소(丹城疏), 덕천서원(德川書院), 영남 3대 의병장(義兵將)…, 진주와 인근 지역 출신 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줄줄 꿰고 있어야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이야기다. 음력으로 1501년생 동갑인 퇴계와는 영남유림의 쌍벽을 이루지만 그와 비교하여 덜 알려지고 연구와 숭앙사업도 뒤쳐진다. 남명이 평생 벼슬을 고사하고 단성소를 올릴 만큼 출사(出仕)를 꺼려한 반면 퇴계는 상당수 사양에도 불구하고 중앙·지방 관직에 많이 나갔다. 퇴계의 문하에는 당대 정승 10여명, 판서 30여명이 배출되었으나 남명의 제자들은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영남 3대 의병을 비롯한 50여명이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퇴계가 남명을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사상에 물든 병통(病痛)이 있다”고 비판하자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대응했다.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분파할 때 대체로 퇴계 후학들은 남인으로, 남명 후학들은 북인으로 변신했다. 광해군 등극으로 북인이 집권하자 남명이 영의정으로 추존된 것도 이 연유다.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송대에서 원·명대로 이어지는 실천학풍을 계승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북인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남명학파는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후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에 겨우 명맥을 이어왔다.
이와 같이 남명은 평생 학문의 순수성을 지키며 재야학자로서 실천궁행에 평생을 바쳤다.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학자인 남명은 조선 성리학에서 실학으로 넘어가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남명학의 핵심은 경의학 이라 할 수 있다. 경과 의는 주역에서 유래한다. 선비는 수양과 실천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긴 장도(경의검)을 늘 차고 다녔다. ‘안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을 단정히 하는 것은 의다’라는 뜻이다. 옷고름에는 성성자라는 방울을 달고 다녔다. 성(惺)은 깨달음을 뜻한다.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명종에게 올린 단성소는 ‘임금을 한 고아로, 대비를 궁중의 과부’로 쓰며 목숨을 내어놓고 올린 대국왕 경고문이다. 남명학 현창(顯彰)이 부진한 원인은 위와 같은 정치적 이유와 함께 출사를 꺼려한 스승의 학풍에, 퇴계와 달리 저술이 거의 없는 남명 본인의 영향도 깊다.
그러나 이제 남명이 우리 곁으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경남도와 9개 기관·단체는 지난 5일 남명과 선비문화 계승·발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가야사 발굴에 이어 지역의 역사문화를 진흥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제 남명을 공부하는 것은 후손·후학들의 의무다. 지난 9일 개관한 서울 남명학사 입주학생들부터 시작하자.
최임식(한국토지주택공사 지역발전협력단장)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