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8 (61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8 (613)
  • 경남일보
  • 승인 2018.03.1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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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될 줄 알아서 시원하게 약속이라도 미리 해줄걸”

호남은 양지의 앙상한 손을 굳게 잡은 채 뜨거운 입술을 눌렀다. 메마른 손등이 온통 눈물로 젖었다.

“제발 살아나기만 해라. 우리가 살 집은 뒤에 지어도 된다. 언니의 약속은 칼같이 꼭 지킬께.”

호남이 아무리 진정어린 약속을 해도 양지는 반응이 없다.

그렇지만 양지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감은 눈 속으로 전원의 풍경은 더 환하고 또렷이 잘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 대신 마음의 동작도 더 가벼워졌다. 어서 깨어나면 언니하고의 약속부터 지킨다고 호남이 약속했으니 호남의 말은 믿어도 된다. 바람을 탄 배가 순항을 하듯 사업운도 좋으니 자기가 한 말도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 어디로 통하는 곳인지 인지하는 순간 우련히 성남언니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찌르르 심장을 감돌았다.

‘언니야, 미안해. 열심히 살아서 언니가 원하던 일을 다 실천하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됐어. 이제 나도 여기가 끝인가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눈이 안 떠져. 말을 하고 싶어도 입술이 맷돌짝 같이 무겁고 준비한 말은 모두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네.’

중얼거리는 양지의 망막 속으로 너울처럼 가벼운 옷을 하늘거리며 새처럼 날아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토록 그리며 영혼에 아로새겨져 있던 언니, 성남이었다. 
양지는 금방 어린 시절처럼 언니를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언니야, 형제끼리 싸우다가 이렇게 끝내다니 너무 속상해죽겠다. 진주 정신, 진주 정신, 하는 오빠를 도와서 끝까지 한 번 잘해보고 싶었는데." 

 "걱정마라. 폭풍이 지나가면 새날이 오듯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야. 내 눈으로 본 세상은 이미 흐름이 달라지고 있어. 우리 호남이가 ‘여성상위 시대, 여성상위 시대’ 하듯이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의 바람이 불거다. 산 높은 계곡의 어둠이 사라지고 높낮이가 평정되는 동안 적잖은 혼란은 겪겠지만."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언니가 씨익 웃으며 귀애하던 어릴 때처럼 양지의 두 볼을 살짝 건드렸다.
 "귀신이 그것도 모를까?"
 "참 그렇구나."

 전지전능한 신격에 대한 신뢰의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는 양지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드리워졌다.

 "쾌남아, 너무 속 끓이지 마라. 그 동안 애 많이 썼다. 그만하면 네가 할 만큼은 한거라. 네가 못다한 일은 남아있는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거야. 우리는 이제 그들이 마음먹는 대로 잘되게 힘이나 팍팍 보내면 돼.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게 마련이니까 더 이상 애태우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내 손을 잡아라."

 "그럴까, 언니?"

 "그럼 여자가 무엇이냐? 눈을 뜨면 만능인 것을 그동안 우리는 너무 무지했고 환경의 억압을 벗어던질 힘을 얻지 못했던 거잖아."

양지가 성남의 손을 잡자 바람처럼 가볍게 몸이 날아올랐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연이 암울한 이 분위기를 타파할 무슨 기회라도 잡은 듯, 냇물 옆 한 곳을 가리키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이모, 저기 갈대밭에서 뭐가 기어 나오고 있어요!”

정말 수연이 가리킨 갈대 숲 속에서 살아있는 물체 하나가 빽빽한 갈대 사이를 힘들게 비집으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같은 곳으로 눈길을 보내던 호남이 냇가로 내려가 꿈틀거리는 생명체 하나를 건져 올렸다.

“이모 고양이에요, 얼룩 고양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발견한 환희로 수연은 양지를 흔들며 소리쳤다. 양지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먼 길을 헤매 다녔는지…….”

수연이와 마주앉은 호남은 남루하고 기진맥진한 얼룩고양이를 개울물로 헹구기 시작했다.

大 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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