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원권 지폐속 풍죽도 이야기
오만원권 지폐속 풍죽도 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8.04.0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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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숙

사대부들이 여흥으로 즐긴 그림, 문인화는 사물이 지닌 외면의 표현보다는 작가가 지닌 내면의 정신을 강조한다. 오만원권 지폐 속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묵죽 화가로 꼽히는 세종대왕 넷째 아들의 증손인 탄은 이정선생의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풍죽(風竹)도’가 담겨있다.

문인화는 전문적인 화가의 그림이 아니므로 때로는 표현이 서툴러 묘사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각자의 주관대로 관념의 세계를 양식에 구애됨 없이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두어 자신의 심중을 표현하는 동양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장르이다.

탄은의 풍죽도 속의 대나무는 거친 바위틈에 뿌리내려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서 있다. 담묵(淡墨)으로 희미하게 그려진 바람에 나부끼는 세 그루의 대나무가 뒤로 보이고 앞에는 농묵(濃墨)으로 짙게 표현된 대나무 한 그루가 한복판에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대나무의 윗부분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지만 아랫부분은 바람이 부는 반대편이 아닌 오히려 바람이 부는 쪽으로 휘어지게 그려져 있고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 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다. 힘겹게 견디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바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극명한 흑백과 농담의 대비, 굳센 필체, 간결한 화면구성으로 긴장감 또한 엿보인다. 화면의 집중도를 높이고 대나무의 기세를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바위나 흙의 묘사는 자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다. 외부의 시련과 압박을 상징하는 바람에 의연히 맞서고 있는 선비의 절개를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댓잎 한 획, 한 획이 올곧아 꺾이고 부러질지언정 굽히고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인다. 나부끼는 대나무는 이미 바람과 혼연일체라, 어느새 고된 몸부림은 춤추는 듯하다.

혁신과 위기, 극복으로 이어지는 당시 사회의 흐름, 이러한 시대 흐름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일급 선비로, 당대의 정서와 미감을 대나무를 통해 온전하게 형상화했다. 세찬 바람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선비의 절개, 선비의 이상과 지향을 가장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풍죽의 의미를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만원권 지폐 뒷면에 어몽룡의 월매도와 탄은 이정선생의 풍죽도가 함께 실리면서 세로로 길쭉하게 세웠어야 할 그림을 가로로 눕히면서 원작의 구도와 조금 달라져 아쉬움은 있지만 오만원권 지폐 속에 풍죽도가 실린 의도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강현숙(진주미술협회 문화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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