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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화백 예술세계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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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16  2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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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숙
이성자화백 탄생 100주년 특별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진주시립 이성자미술관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성자화백은 한국적 사상과 시정을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 속에 합류시키는데 역할을 한 제1세대 재불 화가이다. 1918년 진주에서 태어나 2009년 향년 9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에 지방 군수를 역임하던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해, 창녕, 진주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 은퇴로 가문의 터전인 진주에 정착했다.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현재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구의 신문학을 가르치는 일본 도쿄 짓센여자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했다.

대학졸업 직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출신 외과의사와 결혼해 아들 셋을 낳고 한 남자의 아내로 세 아이의 어머니로, 여느 주부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느닷없이 찾아든 남편의 외도와 가정불화로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된다. 때는 서른넷 되던 1951년, 한국전쟁 발발로 암울한 시대적 상황만큼이나 이 화백 개인의 삶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오갈데가 없어진 그는 세 아들과의 생이별이라는 아픔과 상처를 안고 혈혈단신, 쫓기듯 이 땅을 떠나게 된다. 무일푼, 무명의 신세가 된 그는 불어 한자 모른 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당시 주불 영사관 서기관의 도움으로 기적같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머나먼 프랑스로 가게 된다.

이 화백이 화가로서의 제 2의 삶은 순탄치 못했던 굴곡진 인생 탓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었다고 해야 할지 감히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연의 삶은 이성자 화백 예술세계의 원천이 된 것 만큼은 사실이다.

그는 타국 삶의 여정 순간순간 수많은 역경 가운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한국에 남겨둔 세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먼 이국땅에서의 삶은 고국에 두고 온 어린 세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책감으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움을 붓질의 노동으로 대신 했고 자식들에게 밥을 먹이듯, 옷을 입히듯 그렇게 예술형식을 승화시켰다. ‘노동집약적’ 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화백 초기작 ‘여성과 대지’ 시리즈에서의 직선·삼각형·사각형·원 등의 기하학적 부호들은 세 아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아낸 회화 언어, 조형 언어이다. 넓은 캔버스에 채워진 촘촘한 붓 터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부가 대지에서 경작을 하는 듯하다.
 

강현숙(진주미술협회 문화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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