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지피지기 백전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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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8.05.07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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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첫번째 참패를 기록한다. 월등히 많은 병력과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임진년 진주성 전투에서 참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군은 진주성 수성군의 병력과 지휘자를 알지 못했다. 일본측 사료에는 ‘경상감사 김사순의 예병 2000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 김시민과 곤양군수 이광악 군사 100명과 3800명의 관군이 지키고 있었다. 일본은 진주성 1차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전사한 사실도 몰라, 풍신수길은 계사년에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의 목을 반드시 가져오라고 엄명하였다.

정세 파악을 잘못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벌이기 전, 조선 팔도에 수백명의 세작을 보내 주요 지형지물을 베끼고 민정을 염탐한다. 이 세작들은 정세를 파악한 후 보고하기를 ‘만약 우리가 쳐들어가서 왕만 사로잡는다면 백성들은 새로운 점령군이 왔다고 환호하며 신세계에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다이묘(봉건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왜냐면 영주가 패해 죽으면 휘하무사들은 알거지로 떠돌이 낭인이 되고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 말부터 계속된 일본인의 약탈행위에 침략자로 여겼으며 문화적으로 멸시하여 왜로 불렀다. 이러한 일본으로부터 대대적인 침략을 받자 민족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 봉기였다. 의병을 조직한 의병장은 사회의 상층부에 있으면서 정신적인 지도층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층으로 농민과는 토지를 매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향토 침입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민간에서 일어난 의병이 전투에 참전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왜군은 관군만 상대하면 된다고 여겼던 전략에 혼란이 생겼다.

또한, 진주성을 지키는 수성군의 전력을 얕보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총으로 무장했으니 일본군에게 진주성 함락은 쉽게 보였다. 그러나 성 안은 많은 화약이 비축되어 있고, 다량 살상용 현자총통, 시한폭탄의 비격진천뢰, 질려포(수류탄에 해당), 차대전 등 중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평구가 하늘을 나는 ‘비차’를 제작하여 진주성 상공을 날아올라 적정을 살피고, 종이폭탄을 떨어뜨려 적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 옛날 하늘 위를 엄습하는 ‘비차’의 비행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군은 또, 진주성을 둘러싼 지형적 특성을 알지 못했다. 남강 물을 성 주변으로 돌려 깊고 넓게 조성된 해자는 성으로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강이 흐르고 있는 성의 남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마저 버티고 있어 성을 포위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밤에는 강 건너 망진산에서 의병들이 함성을 지르고 횃불을 흔들어 위협을 가하는 것도 위협적인 존재였고, 남강은 유등으로 낮처럼 밝아 강을 건너지 못하여 속수무책이 되었다.

진주대첩은 6일간 벌어진 혈전이었다. 왜의 병력을 몰라 몇 번이나 위기가 있었지만, 지휘자의 뛰어난 지략이 돋보였고, 민·관·군의 생사를 같이하는 일치단결이 전투의 동력을 높여주었으며, 화약과 화포를 이용한 철저한 대비의 결과이다. ‘손자병법’에 비춰보면 적을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나를 알아서 이긴 싸움이고, 적의 실태를 알았다면 위태롭지 않았을 것이다. 진주대첩은 ‘知彼知己 百戰不殆’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역사적인 전투다.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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