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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품에 안긴 고즈넉한 천년고찰산청 역사문화 유적지 내원사 탐방
원경복  |  011871627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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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7  22: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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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원사 비로전


어느덧 한낮 수은주가 25도를 넘기는 진초록의 계절이다. 나들이 하기에 계절의 여왕 5월만큼 좋은 계절이 또 있을까. 시야를 간지럽히는 초록빛의 향연을 손안에 쥐어보고 싶어 이번엔 산으로 가보자 마음먹었다.


차를 몰아 민족의 영산,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나칠 때마다 그 변화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는 산청군 신안면 원지마을을 거쳐 단성면 국립산청호국원을 지나니 남명조식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시천면에 다다른다.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지은 덕천서원을 지나 삼장면 대포리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면 내원사로 오르는 길목인 장당계곡을 만날 수 있다.

◇오후 햇살에 붉게 빛나는 내원사 삼층석탑

장당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좌측 내원골과 맞닿는 지점에 내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찰 앞 작은 공터에 주차를 하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연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산청이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싱그러운 숲 냄새에 기분이 들뜬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탓인지 직원 두어명이 바삐 움직이며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다.

발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레 오후 햇살을 받아 붉은 빛을 띠는 석탑에 눈길이 간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보물 제1113호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이다.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됐다. 그것을 1961년 내원사에서 복원했다.

 

   
▲ 산청 내원사 삼층 석탑3


1361년전 만든 석탑이라니. 으레 오래된 사찰이면 하나씩 있는 보통의 탑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석탑이 붉은 빛을 띠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철분이 많이 함유된 돌이라 그렇단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흔적을 보는 듯해 살짝 안쓰럽기도 하다.

비록 석탑 외관은 세월에 쓸려 거칠어지고 군데군데 부서지기도 했지만 역사적 가치는 상당하다. 전체적인 석탑의 형상은 늦은 통일신라시기의 것임을 짐작하게 하지만 여러장의 돌을 짜 맞춘 기단은 이른시기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를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300여년 역사 간직한 천년고찰 내원사

내원사의 첫인상은 ‘소박함’이었다. 키 높은 일주문도 없었고 대웅전을 비롯해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도 여타 유명 사찰에 비하면 자그마하다.

그러나 이 소박한 고즈넉함 속에 담긴 오랜 역사를 알고나면 결코 작아보이지 않는다.

내원사를 설명하는 안내문에는 신라 무열왕 4년(657)년에 원효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에는 덕산사로 불렸는데 이후 888년 동방의 대보살로 불렸던 무염국사가 상주하며 수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오래된 사찰들이 그러하듯 천여년이 지난 광해군 1년(1609)에 원인모를 화재로 절터만 남기고 전소됐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고 내원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해진다.

마냥 역사 속 인물로만 알고 있던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라니 새삼 내원사의 역사와 기원이 크게 다가온다.

 

내원사의 기원인 ‘덕산사’는 산청군 시천·삼장면에서는 아주 낯익은 이름이다. 옛 부터 삼장면과 인근 시천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리잡은 터를 ‘덕산’이라고 부른다.

시천면 초입의 남명 조식 유적지 인근을 입덕문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통칭해 덕산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이름을 덕산으로 지었고 강변에 조성된 시장의 이름도 덕산시장으로 부른다. 하물며 농협하나로마트의 이름도 덕산지점이다.

이처럼 지역의 이름과 같은 기원을 가진 지금의 내원사는 작고 소박하지만 여느 사찰보다 정감있고 가까운 느낌이다.

◇국보 지정된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작은 건물 6채에 불과한 내원사지만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외에도 최근 국보로 지정된 산청 석남암사지 비로자나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상이 있는 비로전으로 들어서자 세월의 풍파에 깎여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돌불상이 눈에 들어온다. 워낙 오래된 탓일까,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눈코입의 표현이나 옷깃, 손모양 등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불상의 옆으로 돌아서니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던 특이점이 눈에 띈다. 마치 방석을 깔고 앉은 듯 어색한 가부좌와 몸의 비례와 맞지 않는 너무 얇은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산청 석남암사지 비로불좌상
   
▲ 산청 석남암사지 비로자나불좌상 안내문


찬찬히 살펴보니 불상 아래의 좌대와 불상의 등 뒤를 받치고 있었을 광배가 서로 떨어져 깨진 듯 보였다. 자세히 보면 목 부분이 깨져 시멘트로 이어 붙여 놓은 자국도 보인다.

단순히 오랜 세월 탓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많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불상 아래 좌대 부분의 연꽃잎 모양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는데 반해 불상의 훼손 정도가 심해 무척 안타깝다.

비로자나불좌상은 1990년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됐다가 2016년에 국보 제233-1호로 승격됐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 불상을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곧게 편 왼손 집게 손가락을 오른손 안에 넣는 지권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라고 하니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유물이다.

비록 불상의 얼굴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불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은 지권인이 뚜렷한 모습을 보니 중생을 아끼고 사랑한 부처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내원사 탐방을 마치고 돌아내려오는 길, 아무래도 상처투성이인 불상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삼장면에 거주하는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자 前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조종명 옹에게 연락을 취해 연유를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불상은 원래 내원사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라고 한다. 인근 석남리에 커다란 돌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의 절터인 석남사에 남아있던 불상이라고.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1945~1947년께 이 지역에 살던 한 형제가 이 불상을 발견하고 집으로 옮기려하다 무게 때문에 여의치가 않자 무게를 줄이려고 불상을 좌대와 광배에서 떼어냈다는 것.

무지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참극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상의 지권인 만은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비로자나불이 그 형제를 꾸짖지 않고 자비롭게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원경복기자

 
산청 내원사 전경 1
산청 내원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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