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서원에서 채우는 시대정신
서산서원에서 채우는 시대정신
  • 경남일보
  • 승인 2018.05.2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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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단종이 폐위돼 영월에 있다가 금성대군의 복위시도로 사약을 받자 조려는 밤낮을 달려 청령포에 도착했는데 한밤에 나룻배도 없어 통곡하던 중 호랑이가 태워 줘 무사히 시신을 수렴하고 돌아왔다’

대동기문 등에 기록된 이 호배도강(虎背渡江)전설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의 충절을 잘 보여준다. 그는 단종 양위 후 시와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경은 이맹전(李孟專)은 30년을 청맹과니(靑盲--)에 귀까지 멀었다고 속이며 영월을 향해 절했는데 점필재의 기록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원호(元昊)는 단종의 삼년상을 치른 후 벼슬도 사양하며 항상 영월 쪽으로 앉고 머리도 그쪽으로 하고 잤다.

매월당 김시습은 단종이 양위하자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떠돌았으며 문두(文斗) 성담수는 아버지의 묘소 밑에 숨어살면서 시와 낚시로 소일했다. 추강 남효온(南孝溫)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황후의 소릉을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려 평생 떠돌아 다녔지만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사육신으로 추앙받자 자신마저 생육신이 되었다.

영남유림이 생육신도 사육신처럼 제향을 올려야 한다고 상소해 1706년 조려가 살던 원북마을에 서원이 세워졌으며 1713년 서산(西山)이란 사액을 받았다.

공자가 인(仁)을 얻었다고 한 백이와 숙제는 무도한 주나라 무왕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며 수양산에서 굶어죽는데 ‘서산에 올라가 고사리나 캐자’는 시에서 서산이 절개를 상징하므로 이름으로 내렸다.

그 후 조려가 학문을 가르치던 쌍안산이 백이산이 되었고 서산서원 안에는 채미정이 세워졌다. 채미(菜薇)는 ‘고사리로 연명한다’는 뜻이니 둘의 절개를 잇는다는 의미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됐다 1984년 복원되어 해마다 중양절이면 생육신의 후손들이 국천제를 올리는 서산서원을 둘러보고 채미정에서 백이산을 바라보면 생육신의 절개에 가슴이 미어진다.

‘물질문명의 시대에 웬 너스레냐’고 할 수 있지만 한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은 정말로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다.

조선시대도 다하고 대한민국도 정부 수립 이후 많은 발전이 있었기에 이미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이 도래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절개(節槪)가 중심이었던 생육신처럼 청렴과 정의로 삶을 채우는 큰 사람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조정래(함안군 환경위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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