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를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특별히 네덜란드를 꼭 집은 것은 변화무쌍한 이 나라의 날씨 때문이다. 7월에 접어드니 비바람이 몰아치던 짖궂은 날씨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한국의 초 봄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햇볕을 쬐기 위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공원에 누워 여름을 즐긴다. 또한, 네덜란드의 여름밤은 길고도 길다. 밤 10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 아니라 꼭 25시간 그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네덜란드만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여행이 사람들의 지친 일상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여행관련 산업들이 계속해서 성장 중이다. 이제는 짧은 기간 동안의 휴가가 아니라 특정 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한 달 살아보기 같은 장기 여행도 크게 인기를 누리는 추세다. 구경만 하고가는 관광객보다는 한곳에 길게 머물며 그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현지인들의 삶을 체험 하고 싶은 여행자들의 로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목적에 맞는 도시를 하나 꼽자면 단연코 ‘라이덴(Leiden)’이다. 여행관련 서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뿐 더러 관광도시도 아닌 라이덴의 매력은 바로 여유속의 활기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덴 대학교가 위치한 이 도시는 각 국에서 모여든 젊은 층들과 아름다운 도시경관으로 네덜란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힌다.
라이덴은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도 명성이 높은데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비롯하여 자연사 박물관 등 크고 작은 박물관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색적인 박물관도 만나볼 수 있는데, 라이덴 대학교로 향하는 운하 길목에서 일본 박물관을 찾을 수 있다. 이 박물관은 유럽인들에게는 동양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아시아인들에게는 네덜란드에서 만나는 일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주요도시도 아닌 라이덴에 일본박물관이 위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국의 멋 전하는 일본박물관
지볼트 일본 박물관은 필리프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1796-1866)의 개인 수집품을 기초로 하는 박물관이다.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출신의 의사로 언제나 타국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탐험가이기도 했다. 어느 날 지볼트는 지인의 초대로 네덜란드에 방문했다가 그 곳에서 군의관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바타비아에 도착한 지볼트는 때마침 병마와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의 치료를 도와주어 능력과 노고를 인정받았다. 총독은 지볼트를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고 있던 일본의 데지마(Dejima)로 보내어 의료 활동을 계속 하도록 했다. 먼 나라를 탐험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지볼트에게는 일본이라는 새로운 나라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커다란 기회였다.
탐험가 꿈 이룬 군의관 지볼트
1823년 지볼트는 네덜란드와의 무역요충지였던 데지마(Dejima)섬에 거주 의사이자 과학자로 발을 내딛었다. 당시 데지마는 17세기이후 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회사가 파산한 후에는 네덜란드 정부 주관으로 교역소 역할만을 담당해왔다. 이것은 인도네시아와는 다르게 네덜란드가 일본을 식민지로 삼지 못하고 교역만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특히 서양의학을 접할 수 있었던 큰 계기가 만들었다. 일본 과학자들은 지볼트로부터 백신 접종 및 해부학을 최초로 전수 받으며 서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지볼트에게는 토착민의 관습이나 문화를 경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볼트는 일본현지 관료를 또 한 차례 성공적으로 치료 한 후 그가 머물던 데지마를 떠나 더 넓은 지역에서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1824년에는 나가사키에 설립한 의학대학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지볼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학생들은 지볼트에게 일본의 자연과 식물학 연구에 대한 도움을 주었다. 지볼트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계속 늘어났고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지볼트에게 다양한 물건들을 선물했다. 후에 이 물건들은 일본의 역사와 일본인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지볼트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쿠스모토 타키와의 만남으로 훗날 일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쿠스모토 이네를 얻었다.
일본 동·식물 수집에 열정 불태워
시간이 지날수록 지볼트의 관심은 일본의 동식물 연구에 집중되어졌다. 일본에서 자라는 토종식물을 자신의 정원에 옮겨 심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희귀 동·식물을 수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일본에서 머무는 동안 유럽에서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종류의 동·식물을 라이덴(Leiden), 헨트(Ghent), 브뤼셀(Brussels), 안트베르펜(Antwerp)으로 실어 보냈다. 특히 라이덴으로 보낸 선적에는 일본 자생의 희귀한 도롱뇽과, 수국 같은 식물이 포함되어져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1829년 지볼트는 거래가 엄격히 금지 된 일본과 한국의 상세지도를 손에 넣게 되면서 반역죄와 간첩죄 등의 오명을 쓴 채 일본정부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8년간 지속되었던 일본과 바타비아에서의 생활을 접고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에 돌아와서도 일본에서 수집해온 물건 1만 2000점에 대해 꾸준히 연구했고 일본의 지리학, 식물학, 동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특히 지볼트가 일본에서 라이덴으로 가지고 들어온 비비추, 수국, 머위, 낙엽송 등은 유럽 내의 많은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 새로운 식물을 소개한 지볼트의 공로는 식물이름에 지볼트의 이름을 덧붙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반역죄 쓰고 추방…유럽에 동양자연 소개
현재 지볼트 일본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건물은 1578년에 지어진 것으로 네덜란드에서 이름 난 사람들이 살던 저택이다. 지볼트는 1832년부터 이 건물에 살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박물관에서는 관람객들에게 오디오 가이드를 무료로 대여해주는데 지볼트를 화자로 한 생동감 있는 설명은 관람객들에게 보다 현실감 있는 관람환경을 제공한다. 그림, 그릇, 화석, 동전, 의류, 지도, 동·식물 등으로 이루어진 수집품들은 1800년대 후반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보관상태 또한 매우 훌륭하고 한 사람의 수집품이라 하기 에는 어마어마한 수와 종류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지볼트의 수집에 대한 열망은 유럽대륙과 일본을 문화적으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아 박물관 건물에는 일본의 여러 대학과 네덜란드의 우호적 관계를 위한 유럽 최초의 사무소를 만들었다. 이 사무소는 네덜란드 대학 및 여러 기관과 협력하여 상호간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주소: Rapenburg 19, 2311 GE Leiden 네덜란드
운영시간: 화-일 오전 10시~오후 5시(월요일 휴관)
홈페이지: https://www.sieboldhuis.org/
입장료: 성인 8유로, 12세 이하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