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음유시인 정두수, 가요의 품격을 높이다
[아침논단]음유시인 정두수, 가요의 품격을 높이다
  • 경남일보
  • 승인 2018.08.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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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LH 지역발전협력단장)
대중은 클래식은 작곡가를, 가요는 가수를 각각 기억한다. 고교시절 음악 선생님 말씀이다. 소비자의 음악에 대한 인식법이라 하겠다. 하지만 가요는 가수만 기억하기에는 작사, 작곡 과정이 대단히 창의적이다. 진주 출신 대중음악 작곡가 이재호(1919~1960)를 한국의 슈베르트라 일컫는 것은 두 사람이 분야만 다르지 창작 능력은 공히 천재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가사(lyrics) 또한 창작의 고통을 거쳐야 탄생한다. 시인이 ‘노래한다’는 것은 범속의 일상 단어가 아닌 아름다운 언어를 동원하여 세상을 찬미하는 것이다. 가사는 실제 ‘노래하기’ 위해 세심하게 단어를 고르고 변화시키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작업의 결과물이다. 사실 가사와 멜로디 논쟁은 상당히 대립적이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스팅(Sting)은 “가사와 음악은 마네킹과 옷처럼 늘 서로에게 의존한다. 서로 떨어지면 벌거벗은 인형과 옷감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면 가수 이상은은 “음악은 메시지가 아닌 사운드를 위한 것이다. 음악의 본질은 소리이고 거기에 사상과 이데올로기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라고 했다. 

어쨌든 대중음악에서 가사는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대중이 수용하는 가사의 의미는 노래 자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남인수(1918~1962)는 1936년 18세 때 ‘눈물의 해협’을 발표했으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작곡가 박시춘은 2년 뒤 원곡을 살리고 다른 작사가의 개사(改詞)로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부르게 했다. 소야곡(小夜曲)은 모차르트의 ‘eine kleine nacht musik’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남인수는 이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특유의 미성은 전국을 강타하고 급기야 그는 ‘가요황제’에 등극한다. 

1950년 부산 기장에서 태어난 가수 최백호는 19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하여 단번에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입영전야’, ‘영일만 친구’등 히트곡을 연발한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여배우와의 이혼 등으로 힘든 삶을 이어가며 오랜 침체기를 걷는다. 그가 스스로를 위로하듯 1995년 발표한 ‘낭만에 대하여’ 앨범은 발표 후 2년 동안 하루에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TV 드라마의 마술사 김수현은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2절의 ‘첫 사랑 그 소녀는/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에 완전히 매료된다. 즉시 자신의 KBS 드라마 ‘목욕탕집 사람들’에서 장용이 이 곡을 부르게 한다. 1996년 어느날부터 갑자기 앨범 주문이 밀려들어 전체 35만장이 넘게 팔렸다. 텁텁한 막걸리 같은 중년 가수가 갑자기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로 다시 떠오르는 태양이 된 것이다.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작사로서 ‘가요산맥’이란 위대한 칭호를 받은 이가 있다. 작사가 정두수(1937~2016)는 사실 음유시인이란 칭호가 맞을 것이다. 무미건조한 사랑타령이 아무런 감흥없이 흘러 다니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두수는 가요 가사를 시의 품격으로 맞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두수 작품들은 그대로 시집으로 발간해도 손색이 없다. 스스로도 ‘노래 시인, 노래 시’라고 불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가슴 아프게, 남진).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 오는데’(흑산도 아가씨, 이미자). 듣기는 쉬워도 절묘한 언어의 조합이다. 정두수는 1963년 명곡 ‘덕수궁 돌담길’로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항의 이별’, ‘그 사람 바보야’, ‘마포종점’, ‘시오리 솔밭길’, ‘마음 약해서’ 등 약 3500여곡을 작사했다. 약 500곡은 작곡가 박춘석와의 콤비 작품이다. 이미자와 남진에게만 각각 500여곡씩 써 줬다. 전국 13곳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물레방아 도는데’, ‘삼백리 한려수도’, ‘감나무 골’, ‘하동포구 아가씨’ 등 67곡은 그의 고향을 노래한 것이다. ‘흑산도 아가씨’는 흑산도 어린이들의 청와대 방문 기사에 영감을 얻어 1965년 발표된 작품이다. 풍랑이 거세 좀처럼 육지로 나갈 수 없는 흑산도 어린이들을 육영수 여사가 해군함정에 태워 청와대로 초청한 것. 여기에 강진에 유배중인 정약용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어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한 사실을 엮어 아가씨의 심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동 고전면에서 태어나 명문 동래고를 거쳐 서라벌 예대를 나왔다. 진주농전(현 경남과기대)을 나온 형 정공채는 유명한 시인이다. 형제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어색하여 동생 두채는 예명을 두수로 하여 작사가의 길을 걸었다. 타고난 재능은 숨길 수 없어 ‘백두대간’ 등 시집도 몇 권 출간했다.
최임식(LH 지역발전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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