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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8일 “북녘땅 가보자”“또 만나자” 오늘도 그들은 헤어졌다
김지원 기자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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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6  21: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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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 해외동포들이 참여해 통일의 기틀을 만들기 위한 ‘범민족대회’는 1988년부터 논의가 진행됐다. 그 1차 범민족대회가 1990년 광복절에 열렸다. 남과 북이 함께 행사를 열려했던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고 양측은 따로 범민족대회를 개최했다.

문익환 목사, 전대협 임수경씨(당시 외국어대학생), 황석영 작가, 서경원 의원 등 남북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이름들이 등장했고 국내외의 복잡다단한 문제와 얽혔던 제1차 범민족대회 진행과정에는 당시 노태우 행정부가 제안한 ‘민족대교류’라는 이벤트가 끼어 있었다.

8·15를 전후해 5일간 남북 모두 원하는 사람들을 제한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전면 개방하자는 제안이었다. 우리 정부는 6만 여명에 이르는 ‘방북신청자’를 접수하고 북한에 방문신청자 명단교환을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민족대교류’ 제안을 거부했다. 광복절 전날인 14일까지 신청자 명단을 전달하지 못했고, 결국 민족대교류는 무산됐다.

경남일보 1990년 8월9일자 1면에는 도내에서 2275명이 “북녘땅 가보자며” 방북신청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76세 최고령부터 18세 최연소까지 민족대교류의 대열에 참여하고자 신청명단을 올렸다. 4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남자 1781명, 여자 494명이 신청했다. 그중 이산가족·친지 상봉을 원했던 사람들이 47.9%를 차지했다.

지난 20일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이 22일, 2박3일간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1985년 처음 시작된 이래로 21번째 이뤄진 만남이었다. 65년 세월의 헤어짐을 끊어낸 2박3일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나마도 경남 도내에는 1341명의 생존 이산가족 중 단 한 명만이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참가했다. 더 늦기 전에 헤어진 가족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민족 전체의 마음 속에 조금은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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