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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단상(斷想)이덕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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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30  18: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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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어린 시절 박은 참 궁금증을 많이 주었다. 언제부터 박이 우리 곁에 있었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어린 박은 나물로 먹는데 늙으면 찌고 말려 어떻게 그릇으로 쓸 수 있는지 등등. 구전되어오는 박 이야기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이겠지만 박은 행운을 가져 오기도 하고 유용한 생활 도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두레나 품앗이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모내기나 가을걷이를 하고 논두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눌 때면 하나같이 박 바가지에 밥을 가득 담아들고 먹었고, 동네잔치 날 음식을 얻어먹으려 잔치 집을 기웃거리는 이들도 바가지를 허리춤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며 동냥 도구로 썼다. 그 시절 바가지는 흔한 물건이었지만 가난하고 수더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달빛이 소슬바람을 따라 흐르는 초가을 저녁, 보는 이 없는 산골 오두막지붕에는 박꽃이 핀다. 쓸쓸한 달밤에 피는 박꽃은 희다 못해 푸르기조차하고 청초함을 넘어서 처연하기 까지 하다. 토담을 기어올라 숨어서 피는 박꽃은 기도하는 천상 여인 모습같이 섬뜩한 가련미와 청순미를 풍긴다. 꽃은 대부분 화사하고 생기가 넘치며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특히 하얀 색깔의 철쭉이나 찔레 등은 그 향기가 진하고 독특하나 희디 흰 박꽃은 특별한 향도 없는 소박한 꽃이다. 나비나 벌들을 함부로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수정에 필요한 벌에게만 곁을 주는 느낌이다. 밤에 피는 박꽃은 눈물과 비애미도 가지고 있다. 모두 잠든 밤에 피어 있는 박꽃은 삶에 지쳐 서럽던 우리들의 옛 누이를 생각하게 한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한참을 보아야 꽃으로 보이는 꽃이 박꽃이다.

어린 박나물이나 국은 입맛을 상큼하게 해준다.

멸치국물에 소박하게 끓여낸 박국은 온갖 종류의 조미료 맛에 오염된 미각을 다시 되돌리는데 적격이다. 여리고 신선한 것이 그렇듯이 박국도 박나물도 온도가 조금만 높아도 쉽게 상한다. 박도 박꽃같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올 여름 유난스러운 더위에 지친 시간을 가을저녁 싱그러운 이슬에 식히고 싶다. 염천에 숨죽이며 안으로 내밀하게 준비하던 박꽃이 계절의 변화를 담으며 박으로 태어난다.

울타리와 초가지붕, 어렵게 감고 올라간 탱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박은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준다. 파랗고 하얀 둥근 박 덩이가 얹히고 빨간 고추가 널린 초가지붕은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그림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시골의 풍경들이지만 폭염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어 담백한 백자항아리 같은 박이 열린 가을그림을 서둘러 그려본다.

이덕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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