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생전 행적보고서
[경일칼럼] 생전 행적보고서
  • 경남일보
  • 승인 2018.09.0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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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함양 상림주차장에서 숲속으로 들어가면 문창후최선생신도비가 있다. 신라 진성여왕 대에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숲을 이룩한 공적을 기려 세운 것이다. 숲 이름을 대관림이라 하다가 큰 홍수로 중간 부분이 유실되어 상·하림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이후 하림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상림은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최치원 선생은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과 풍수지리설을 이해한 사상가였던 그는 신라의 풍류를 중심으로 유·불·도의 사상적 융합을 꾀한 선지자, 한국 한문학 조종,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글을 남긴 뛰어난 문장가였다. 문묘 종사 동방 18현으로 설총 다음으로 위패를 모신다.

상림약수터를 지나, 다볕골에 빛을 발한 선현들을 모아 역사인물공원이 조성되었는데, 흉상을 진열하고 비석거리를 볼 수 있다. 흉상은 고운 최치원 중심으로 조승숙, 김종직, 양관, 유호인, 정여창, 노진, 강익, 박지원, 이병헌, 문태서를 좌우로 5명씩 마주보게 배열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1792년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용추계곡 안심마을에 국내 최초의 물레방아를 만들어 실용화한다. 그때부터 “함양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의 서방님은…”라는 민요도 생겨나게 되었다.

연암은 학사루를 수축한 전말을 기록한 ‘천 년 전의 최치원을 그리며’를 썼다.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워, 창고에 곡식을 10만 휘나 쌓아 두게 되었는데, 호조판서가 팔 것을 제안하나 수입이 생길 것을 꺼려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 버렸다. 흉년이 들자 녹봉을 털어 백성을 구했다. 안의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며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저수지 배경으로 석주에 돌 지붕을 얹고 그 안에 비석이 있는데, 아전 임술증의 아내 밀양박씨의 정려비이다. 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든 신랑 임술증과의 혼인 약속을 지켜 결혼, 남편이 사망하자 3년 상을 치르고, 남편이 죽은 그날 그 시점에 자결한 열녀로 연암 박지원이 쓴 ‘열녀 함양박씨전’의 실제 인물이다.

이어 비를 모아 두 줄로 세웠는데, 눈길을 끄는 비석이 있다. 유별나게 두 개의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비석 앞 안내판에는 비문을 옮기고 한글로 번역하였다.

군수 조후병갑 청덕선정비(郡守 趙候秉甲 淸德善政碑),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안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에 비를 세웠다.

비석 옆에 세운 안내문에는, 이 비는 조선 말기 함양 군수(1886년4월~1887년6월)를 지낸 조병갑의 선정비이다. 고부 군수로 재임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착취, 갑오동학농민운동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된다. 조병갑의 선정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이러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사의 교훈이라는 점에서, 보존하기로 하였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고운 선생은 상림과 함께 그 이름 기억될 것이며, 공적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거절한 연암 박지원의 애민 정신은 후세 귀감, 남편 삼년상을 치르고 자결한 박씨 부인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비각 속에 영원히 열녀 및 문학사에도 남겨지게 되었다.

세상의 많은 눈총을 피하려다 기울고, 비신은 검고 두꺼운 이끼로 비문을 감추려는 몸부림으로 보이는 군수 조병갑 선정비는 생전 행적보고서에 읽을수록 사람 향기가 나는 문장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경계석이다.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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