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설운 포도순절
포도가 설운 포도순절
  • 경남일보
  • 승인 2018.09.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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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前 경남도보 편집실장)
정재모
<포도원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꿈으로 탐스럽게 영글더니/ 지금은 네 검은 빛보다 더 서러운 눈빛의/ 인간이 끄는 수레 위에서/ 포도여, 무엇을 울먹이고 있는가/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은/ 네 가슴에 박힌 그 몇 개의 씨알처럼/ 버릴 수 없이 남아 있는가/ 포도여, 검은 회오의 눈동자여.>

작자와 제목은 잊었지만 수십 년래 기억해온 포도 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타나는 포도 트럭 덕분이리라. 미상불 포도 장수가 자주 보인다.

포도의 계절 백로(8일) 절기를 맞은 거다.

백로는 이슬에 흰빛이 돈다는 절기. 서리가 가까워졌다는 예고다. 아침저녁으론 서늘하고 한낮 볕살은 이마에 따갑다. 들녘은 익어 가는 중이고 풀빛은 변하기 시작했다.

익히고 살찌우고 색깔 바꾸는 볕발의 마술! 태양만이 부릴 수 있는 축복의 조화다. 그럴진대 아직 좀 남은 한낮 더위를 지청구할 일은 아니리라.

‘백로 비는 십리에 천석 늘린다’는 속담도 있지만, 지지난주부터 열흘도 넘게 질금거리는 초가을 비는 과일 농사에 안 좋다. 백로가 비를 만나면 백과가 겉여물고 단물이 빠진다는 사실 역시 선인들이 축적해온 경험인 거다. 하지만 지난여름 비가 귀했던 탓에 올해 포도는 유난히 달단다.

포도 한창인 때를 옛사람들은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 했다. 백로에서 추분까지의 한 보름간을 멋스럽게 이르는 말로, 바로 요즘이다.

백로엔 제비가 떠나고 기러기 날아온다고도 했다. 이산가족처럼 잠시 만나고 이내 헤어지는 애처로운 연홍지탄(燕鴻之歎), 그 쓸쓸한 별리의 계절 또한 이 무렵이다.

골목의 포도 트럭을 스친다. ‘한 상자 만오천 원’이 비싸 그런가, 고객이 없다. 새까만 포도송이가 왠지 서러워 보인다. 작금 어렵다는 서민경제의 한 단면일까, 홀로 묻는다.

올여름 뜨거운 볕 일조량이 넉넉했던 덕분에 당도는 높으나 작황은 별로 안 좋다는 게 포도 산지의 푸념이다. 그래도 포도는 쏟아져 나왔다. 손님이 없어선지 상인의 얼굴이 어둡다.

비록 트럭 위에 천더기처럼 가득하지만, 농부들이 꿈으로 가꾸어 낸 한 송이 한 송이 들이다. 마침 추석도 눈앞에 닥쳤다. 제철 포도 한 두 상자씩 소비하면서 농부님들의 땀도 생각해 보는 선한 포도순절이라면 좋겠다.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삼았던 포도다. 이 시대 최대의 화두인 출산 친화 분위기와도 썩 어울리는 과일이 또한 포도 아니겠는가.


정재모(前 경남도보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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